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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여성 첫 수상…내 이름 불려 너무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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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자서전’으로 ‘그리핀 시 문학상’ 받은 김혜순 시인

“세월호 참사 등 사회적 죽음 다룬 시, 이곳 심사위원들도 공감한 듯”

영어 번역 한 최돈미 시인과는 “문장의 주어부터 개인사까지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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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인이 25일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그리핀 시 문학상’ 수상 소감 등을 밝히며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죽음의 자서전>은 죽은 자의 죽음에 대해 쓴 것이라기보다 산 자로서 죽음을 쓴 시집입니다. 산 자로서 죽음과 같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여성적·사회적 경험을 쓴 것들입니다. 그리핀문학상 심사위원들도 그런 경험이 있었을 테니까, 그런 시적 감수성이 그들에게 닿지 않았을까요.”

캐나다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그리핀 시 문학상(Griffin Poetry Prize)을 수상한 김혜순 시인(64)은 25일 서울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김 시인은 아시아 여성 시인 최초로 그리핀 시 문학상 본상을 수상했다. 한강 작가가 수상한 맨부커상이 영어 번역 소설에 주는 상이라면, 그리핀 시 문학상은 영어로 번역된 시집에 주는 상이다. 김 시인은 지난 7일 <죽음의 자서전>(문학실험실)을 번역한 최돈미 시인과 이 상을 공동 수상했다.

“영어로 번역된 시집이 한 해 500~600권이 되는데 모두 그리핀 심사위원들이 본다고 해요. 번역자인 최 시인과 저는 ‘우리는 동양인이고 여성인데 절대로 못 받는다. 축제를 즐기고 오자’고 하고 갔습니다. 토론토엔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있어 미래도시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정작 낭독회장이나 시상식장엔 전부 백인들만 있었어요. 최 시인과 저만 아시아인이어서 수상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제 이름이 불렸을 땐 너무 놀라 현실이 아닌가 보다 생각했어요.”

그리핀 시 문학상 본상 상금 6만5000캐나다달러는 번역자와 시인이 6 대 4의 비율로 나눠 갖는다. 김 시인은 “그리핀상이 영어로 번역된 시집에 주는 상이기 때문에 번역자에게 더 많이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시인과 번역자인 최 시인의 인연은 20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 시인이 김 시인의 시를 번역하고 싶다고 무작정 찾아왔다. 최 시인은 김 시인과 최승자·이연주 시인의 시를 모은 시선집을 영문으로 번역했다. 그것을 인연으로 총 6권의 시집을 영역했으며, 현재 김 시인의 최근작 <날개 환상통>을 영문으로 번역 중이다. 김 시인은 “최 시인이 번역을 하면서 제 의견을 많이 물어본다. 문장의 주어부터, 시를 읽고 나서의 느낌, 나에게 일어난 사건과 같은 개인사까지 소통한다”며 “시가 어떤 현실에 기반하고 있는지 서로 소통한다”고 말했다.

그리핀 시 문학상을 수상한 <죽음의 자서전>은 메르스 사태, 세월호 참사 등 사회적 죽음을 접한 김 시인이 실제 고통을 앓으면서 쓴 죽음에 관한 49편의 시를 담았다. 퍼블리셔스 위클리는 “김혜순 시인이 구축한 놀라운 건축물은 구조적 참상과 개인적 죽음, 그 둘 사이의 연관을 충분히 드러낸다”고 평했다. 김 시인은 49편의 시 중 제일 아프게 다가오는 시로 ‘저녁메뉴’를 꼽았다. 이유는 엄마라는 단어가 많이 나와서라고 한다. 김 시인은 수상 소감에서 “병과 싸우고 계신 우리 어머니께 이 영광을 드리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얼마 전 병상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이 있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시인인 김 시인은 여성의 정체성에 기반해 남성중심적 언어를 거부하고 틀을 부수는 시쓰기를 해왔다. 시뿐 아니라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여자, 시하기>란 산문집을 통해 여성으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사유를 적어왔다. 오는 7월엔 티베트, 인도 등을 여행한 이야기를 담은 <여자짐승아시아하기>를 출간할 예정이다. 김 시인은 “페미니즘이 시와 만났을 때 어떤 모습일까에 대한 사유를 산문들에 담았다”고 말했다.

간담회에 참석한 이광호 문학평론가(문학과지성사 대표)는 “김혜순 시인의 수상은 한국의 여성적 발화가 강력한 동시대적 보편성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기존 한국 문학을 세계에 소개할 때 남성 작가들의 큰 이야기를 중심으로 했는데, 여성들의 몸에서 터져나오는 발화가 세계적 보편성을 갖고 세계 독자들의 호응을 받는다는 지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올해로 등단 40주년인 김 시인은 “당면한 오늘의 한국 사회 문제 속에서 사유를 하고 시를 쓰기 때문에 돌아볼 시간이 많지 않다. 별 소회는 없다”고 말했다. 늘 지금, 여기에서 사유하는 김 시인은 결코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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