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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최현숙의 내 인생의 책]②이청준의 소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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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런 글이

경향신문

이청준에 대해서는 어느 책 하나를 지목하기 어렵다. 어떻게 이청준을 읽기 시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락방과 학교 도서관과 서울의 공공 도서관들을 떠돌던 난독의 시절 어디 즈음에서 그를 만났을 테고, 첫 책에 이어 그의 단편과 장편들을 연이어 읽었다. 중학교 1학년 이후 어느 즈음 그를 만났을 텐데,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절망했다. “정말 잘 쓰는구나.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잘 쓸 수 있지?”라는 생각은 “이렇게 쓰지 못하느니 글을 쓰고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좌절로 이어졌다.

이청준의 소설에 나오는 한과 고난과 기벽의 인물들을 읽으며 내 상처를 핥고 내 기벽에 너그러워지면서, 내 꼬라지와 짓거리들에 이름과 의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낮이면 짓거리들 사이를 미친년 널뛰듯 헤맸고, 밤이면 자괴에 빠진 채로 짓거리들의 이름과 의미를 찾아 헤맸다. 나를 포기할 수 없어 변명 삼아 붙인 이름과 의미들 덕에 내 꼬라지와 짓거리에 뭉개지지 않았구나. 믿어지지 않지만 살아갈 핑계를 위해서는 안 믿을 도리가 없었던 그 이름과 의미들이 흩어지지 않고 내 안에 묻혀 있었고, 삼십여년의 사회운동과 여성주의 활동을 통해 나와 세상에 대한 반역의 언어로 되살아났다. 마흔 하고도 십년 더 넘긴 쉰 초반, 가족과 조직을 떠나 혼자만의 단칸방을 확보했다. 밥을 벌기 위해 만난 가난하고 늙은 사람들의 몸과 말을 만나며 반역의 언어는 관점과 질문으로 살아날 수 있었고, 글과 소리가 되지 못한 그들의 흔해빠지고 쓰잘 데 없다는 말, 말, 말을 끌어냈다. 그러니 내게 구술생애사는 내 상처와 꼬라지와 짓거리들에서 실마리가 이어진 타인의 상처와 꼬라지와 짓거리들의 실타래들이자, 나와 세상에 대한 반역의 갈망이다.

최현숙 | <할매의 탄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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