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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정윤수의 오프사이드]‘비정상성’을 없애야 진짜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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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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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는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고 했다. 나름 어떤 분야를 알고자 하였고 그 앎이 휴대폰 두께 정도는 되어 어느 정도 좋아하고는 있으나 실은 즐긴다는 게 무엇인지 가늠조차 못하고 있는 형편이니, 이런 내 경우로 보건대 ‘즐긴다’는 경지는 속없이 히히거리는 것은 아닌 듯싶다.

경향신문

스포츠는 말해 무엇하랴. 국가대표 출신으로 스포츠혁신위원으로 활동 중인 이영표는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 여기서도 ‘즐기다’는 지든 이기든 상관없이 히히거리는 것과는 무관하다. 이영표 자신이 온몸을 던지며 증명하지 않았던가. 은하계 최고 스타 리오넬 메시가 “축구는 직업이 아니라 즐겁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는 규칙이 제한하고 상대방이 압박하는 상황에서 어느 순간 저 드높은 초월의 세계로 질주한다.

경쟁과 승패는 스포츠의 본질이다. 다른 분야에 비해 단기간에 결판 난다. 그날그날 승패가 분명하기 때문에, 인생 전체에 걸쳐 어떤 결실이 확인되는 다른 사회적 행위에 비하여, 냉혹한 면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즐기란 말인가. 그럼에도 명장들은 즐기라고 한다.

우리 스포츠 역사에서 감독이 ‘즐겨라’라고 지시한 최초의 사례는 2002 한·일 월드컵 때의 거스 히딩크 감독이다. 그는 폴란드전을 앞두고 팀 전체에 “경기를 즐겨라”라고 말했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 후반 막판에 차두리를 투입하면서 “가서 즐겨라”라고 했고, 2012 런던 올림픽 때는 홍명보 감독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충고는 열심히, 그리고 즐기라는 말”이라고 했다.

도대체 즐긴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틀림없는 사실은 이기면 좋고 져도 그만이라는 식으로 왔다갔다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모든 감독과 선수들이 그러했거니와 숨 막히는 경기를 지켜보는 모든 관계자와 팬들의 끓어오르는 열정 또한 그러하다. 무엇보다 당장의 경기에서 승패가 확정되고 이로써 이루 말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 현장의 지도자와 선수들이 단순히 웃고 떠들다가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스포츠는 그 승패의 엄중함에 의하여 존립한다.

그렇다면 일단 그 경기를 준비해나가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지도나 연습을 건성으로 설렁설렁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일반적인 공부도 힘이 들고 몸으로 하는 스포츠는 당연히 더 힘겹다. 회사든 경기장이든, 소풍 가듯이 가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즐겁게? 그렇다면 어떻게? 이 점이 중요하다.

경쟁 자체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 경쟁을 준비하고 훈련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우리 스포츠 문화에서 다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은 ‘스포츠가 지닌 본질, 즉 경쟁’을 가벼이 여기는 게 아니라 그 ‘경쟁’에 수반되는 온갖 비정상적인 요소들을 해결하는 것이다.

스포츠를 스포츠답게 하는 것은 당연히 경쟁이다. 그 경쟁에 의하여 몸으로 실천하는 종목에 내재된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되고 동료들과 함께하는 과정에서 평생의 참다운 관계가 맺어지며 매일같이 승패를 겪으면서 내면세계가 더욱 깊어진다. 그리고 당연히 목표를 설정한다. 인생의 목표는 저 멀리 뿌옇게 존재하지만 스포츠에서 목표는 당연히 내일 경기의 승리가 아닌가. 그 목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온갖 비정상성을 없애야 한다.

이미 스포츠 선진국의 오랜 노력은 결실을 보고 있다. 영국은 오랫동안 스포츠 문화 개선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각 스포츠 조직과 지도자, 학부모, 선수들의 제반 교육, 문화, 언어, 관계를 수평적이고 개방적이며 자율적으로 변모시켜왔다. 누구나 차별 없이 스포츠 및 신체 활동에 참여하는 가운데 뛰어난 선수가 자연스레 발굴되고 그 선수는 교육 당국과 스포츠 단체의 유기적 협력 속에서 건강하고 활달하게 성장한다. 그렇게 해서 이길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바로 그 영국이 ‘스포츠강국’인 중국이나 러시아를 제치고 2016 리우 올림픽 2위를 거뒀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일본 또한 마찬가지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에 수영선수로서 출전하여 두 대회에서 모두 금메달을 차지했던 스즈키 다이치. 그는 현재 일본 스포츠청을 이끌고 있다. 스즈키 장관이 주력한 것 역시 모든 사람이 스포츠와 신체 활동에 차별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그 기반 위에서 지도자와 선수가 신체적으로 안전하고 생활에서도 안정적인 지속 가능한 생태계 조성이었다. 이 기반 위에서 2020 도쿄 올림픽을 위해 선진적인 엘리트 프로그램을 가동 중이다. 이 또한 ‘과정’이 중요하다. 안전하고 안정적인 시설과 제도의 완비는 물론 무엇보다 교육권이나 문화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혁신하였다. 이는 지도자나 선수가 은퇴한 이후까지 작동한다. 국가가 이른바 ‘국위선양’을 위해 ‘선발’하면, 그 목표 달성 여부와 상관없이, 은퇴한 이후에도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럴 때 선수들은 스포츠를 높은 차원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승패가 분명한 스포츠 현실에서, 그것도 승패 여부에 따라 진학이나 고용 여부가 결정되는 우리 현실에서 지도자와 선수들이 스포츠를 즐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이 과정에서 발생하였고 또한 오래 누적된 비정상성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혁신을 통하여 무엇보다 현장의 지도자들이 예전보다 더 안정된 조건에서, 저마다의 귀한 경험에 첨단 스포츠과학을 접목하여 그야말로 21세기에 태어난 선수들을 즐겁게 맞이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아름다운 경우를 얼마 전에 우리 모두가 목격하지 않았던가. 한국 축구 U-20 대표팀의 정정용 감독 역시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가서, 즐겨라!”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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