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내가 파악한 바로는 그는 나와 같은 정류장에서 내려, 곧바로 편의점으로 직행한다. 언젠가 한번 편의점으로 가는 그를 따라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그는 아이스크림을 샀다. 물건을 사러 갔다가 본 적도 더러 있는데 언제나 그의 손엔 아이스크림이 있었다. 버스비로 컵라면이라도 먹는다면 모를까 아이스크림이라니. ‘돈이 있는데도 왜 버스비를 안 내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래도 나는 이런 오지랖을 부릴 정도로 덜 붐비는 버스를 타고 다니니 다행이라고 해야겠다.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버스에선 언감생심이다. 하루 일감을 얻고, 빌딩 청소와 경비를 하러 집을 나서는 노동자들로 버스의 첫차는 만원이다.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들의 존재를 일깨운 건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고 노회찬 의원의 2012년 진보정의당 대표 수락연설이었다. 그는 이 연설에서 매일 새벽 버스를 타고 중년 여성들이 강남의 빌딩으로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지만, 이들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노회찬 의원이 세상을 떠난 후 이 연설이 다시 회자됐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서울시는 이달 중순 만원버스에 시달리는 이들의 고단함을 덜어준다는 취지로 4개 버스노선의 새벽 시간대 배차를 늘렸다. 이들의 출근길은 좀 나아졌을까. 서울시의 생색에 비해 체감 효과는 크지 않다고 한다. 2015년 도입한 ‘조조할인제’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추승우 서울시의원이 공개한 ‘최근 3년 대중교통 조조할인 현황 자료’를 보면 교통혼잡 분산을 기대한 당초 취지와 달리 효과가 거의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두 정책 모두 수요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해 정책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피하기는 어렵다.
내 처지를 벗어나 다른 이의 삶을 알아채는 것은 쉽지 않다. 동 트기 전 집을 나선 노동자들로 버스 첫차가 얼마나 붐비는지, 그 안에서 그들이 새벽잠 쫓으며 밀리지 않기 위해 두 다리에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를. 컵라면이 아닌 아이스크림을 꼭 먹어야만 하는 누군가의 ‘현실’은 보이지도 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재빨리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재단해 버린다. 나와는 상관없는 삶이라고.
영화 <기생충>을 보면서 나는 내내 불편했다. ‘봉테일’이 꾸며놓은 영화 속 가난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남의 일인 것처럼 웃음을 터뜨리는 관객들을 보면서 마음이 서늘해졌다. 과연 지금의 나는 그들과 다른가.
이명희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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