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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김민아 칼럼]‘10세 아동 성폭행’ 판결문을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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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 사건에서 강한 폭행, 협박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경우 강간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이는 피해 여성의 내면적 심리와 공포를 도외시한 견해다.” ‘성인지 감수성’이 분명한 이 판결은 언제 내려졌을까. 2004년 10월이다. 서울북부지법 박철 부장판사(현 변호사)는 처남과 동거 중인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남성에게 유죄를 선고하며 이런 판결문을 내놓았다.

경향신문

한국 형사사법은 20세기로 돌아간 걸까. 2019년 6월 서울고법 형사9부는 10세 여아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남성 이모씨(사건 당시 34세)에 대한 항소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사건의 얼개는 이렇다. 보습학원 원장인 이씨는 채팅 앱을 통해 ㄱ양을 알게 됐다. 그는 한밤중에 ㄱ양을 만나 집으로 데려갔다. ㄱ양에게 소주 두 잔을 마시게 한 뒤 술에 취한 ㄱ양이 침대에 눕자 성폭행했다. 1심은 이씨가 피해자를 움직이지 못하게 누른 것이 폭행·협박에 해당한다고 봤다. 반면 2심은 폭행·협박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기소된 혐의(성폭력처벌법상 13세 미만 미성년자 강간) 대신 미성년자의제강간 혐의를 적용했다. 미성년자의제강간은 피해자가 13세 미만임을 알고 간음할 경우 폭행·협박이 없어도 처벌하는 것으로, 형량이 훨씬 가볍다.

기사에서 다루지 않은 ‘감형할 만한 사유’가 판결문에는 들어 있지 않을까? 판결문을 살펴봤다. 더 참담해졌다. 재판부 판단은 이렇다. “영상녹화물에서 피해자는 ‘직접적으로 폭행·협박을 당한 사실은 없다’는 취지로 진술하고, 조사관이 ‘그냥 누르기만 한 거야?’라는 취지로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통해선 피고인이 피해자의 몸을 누르게 된 경위, 피고인이 누른 피해자의 신체 부위, 피고인이 행사한 유형력의 정도, 피해자가 느낀 감정을 확인할 수 없다.” “피고인은 (사건 당시) 피해자가 아프다며 밀어내는 행동을 했다고 진술했으나, 폭행·협박으로 반항을 억압했다고 인정하기엔 부족하다.”

재판부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제기되는 등 논란이 확산되자 설명자료를 냈다. 피해자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수사과정에서의 진술만으로는 폭행을 인정하기에 부족했고, 재판부 권유로 검사가 피해자를 증인신청했으나 피해자가 출석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무죄선고될 사안이나, 형사소송법의 이념인 정의와 형평을 고려해 미성년자의제강간을 유죄로 인정했다”고도 했다.

‘정의’와 형평’은 충분히 고려됐는가. 동의하기 어렵다.

① 아동 대상 성폭력 사건에 ‘아동’이 없다 → 성인 여성도 낯선 조사관 앞에서 성폭력 피해를 구체적으로 진술하기는 쉽지 않다. 피해자는 10세 아동이다. 더구나 술에 취해 누워 있던 상태였다. 조사받을 때도 폭행·협박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재판부는 이런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어떻게, 어디를, 얼마나’ 눌렸는지 말하지 않았다며 피해자 진술을 사실상 배척했다. 한밤중에, 둘만 있는 공간에서, 성인 남성이 술 취한 여아의 몸을 누른 행위가 폭행·협박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② 피고인의 신빙성 검증에 소홀했다 → 1심 판결에는 피고인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한 대목이 있다. “관계 자체를 부인했다가 DNA검사 결과가 나오자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는 등 일관성이 없다.” 2심 판결은 피고인의 신빙성을 다루지 않았다. 술을 먹인 점을 지나친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아동이 의식불명인 준강간 상태까지는 아니었다 해도, 그런 무저항 상태로 이끌려는 (가해자의) 의도가 있었던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③ 판례 변화를 외면했다 → 2심 판결은 폭행·협박의 의미를 가장 좁게 해석하는 ‘최협의설(最狹義說)’을 따랐다. 최협의설은 대법원이 1992년 강간치상 사건에서 “가해자의 폭행·협박은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여야 한다”고 밝힌 데서 비롯했다. 이 판례는 점차 완화돼왔다. 한 판사는 “최근엔 문장상으로 최협의설을 취하지만, 구체적으로는 피해자의 연령 등에 따라 폭행 인정 정도가 다양화되고 기준도 낮아지고 있다”며 “이번 판결이 예외적”이라고 말했다. 대법원도 지난해 “성폭력 피해자의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진술의 증명력을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에 입각한 판단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피고인과 검찰 모두 상고하면서 판단은 대법원 몫이 됐다. 대법원은 선언해야 한다. 성폭력 재판에서 피해자의 특수성을 고려하고, 피고인 진술의 신빙성도 검증해야 한다는 점을. 나아가 대법원은 27년 묵은 판례를 폐기하고 새로운 판례를 수립해야 한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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