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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세상읽기]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모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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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사람들의 자신만만한 발언을 들을 때마다 공연히 비위가 상했다. 최근 들어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한 대학 특강에서 “학점도 엉터리, 토익 점수도 800점”인 청년이 큰 기업 다섯 군데에 합격했는데 그 청년이 내 아들이라고 자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생존권 투쟁에 나선 택시 노동자를 4차 산업 혁신을 가로막는 세력으로 몰아붙인 이재웅 쏘카 대표의 발언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자기 노력으로 성공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무언가 가르쳐야 한다는 의무감에 불타는 것 같다. 나처럼만 하면 되는데, 나는 비법을 알고, 알려 줄 수도 있는데 ‘너희들은 이거 모르지?’라며 섣부르게 가르치려 든다. 물론 부모 잘 둔 덕에 권력과 부를 얻어 사회지배층이 된 ‘블러드 엘리트’에 비해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더 높이 평가받고, 존경을 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향신문

‘포브스’에서는 해마다 한·미·중·일 4개국 부호의 재산현황을 조사해 발표한다. 2017년 현황에 따르면 한국은 이들 국가 중 상속형 부자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였다. 한국은 상위 부호 50명 가운데 상속형 부자 비율이 62%(31명)로 미국의 30.0%(15명), 일본 36.0%(18명)와 비교해도 월등히 높았다. 중국은 상속형 부자가 2명(4.0%)에 불과했다. 그나마 반가운 소식은 한국에서도 이른바 자수성가형 부자 비율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는 기사였다. 개천에서 용(龍) 나기 어렵고 개천마저 말라간다는데, 과연 어떤 사람들이 성공했을까. 그들 대부분은 IT업계 벤처기업가 1세대였고, 1960년대 후반에 태어나 명문대를 졸업하고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주도한 벤처·닷컴버블 시기에 창업한 인물들이었다. 과거 세대에게 정주영과 이병철 같은 이들이 기업영웅이었다면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겐 이들이 새로운 영웅이며 그만큼 영향력도 커졌다.

모 경제신문에서 운영하는 ‘슈퍼리치’ 사이트에서 2019년 6월21일 현재 이들의 재산 소유 현황과 가족관계를 살펴볼 수 있었다. 김정주 NXC 회장(2조660억원)은 유명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중학교 3학년 때 이미 개인용 컴퓨터를 소유했다. 요즘에야 집에 PC 없는 것이 더 놀랄 일이겠으나, 1980년대 초반 가정집에 자기 PC를 가진 중학생은 매우 드물었다. 부친은 아들에게 사업자금을 빌려주었고, 창업 이후 5년간 아들 회사의 대표직을 맡아 각종 계약의 자문역할을 해주었다. 잘 알려진 대로 이해진 NHN 전 의장(1조3442억원)의 부친은 전 삼성생명 대표이사였고 그는 삼성 사내벤처제도를 통해 창업했다. 이재웅 대표는 학창 시절 이해진과 서울 청담동의 같은 아파트 위아래 층에 살았고, 어머니들의 친분 덕분에 서로 가까워졌다고 한다. 그의 부친 역시 한국종합건설 계열사 총괄 부회장을 역임했다. 그렇다고 피에르 부르디외가 <구별짓기>에서 말한 것처럼 문화자본이야말로 계급재생산의 핵심요소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김범수 현 카카오 의장(2조1866억원)은 어린 시절 할머니를 포함해 여덟 식구가 단칸방에 살았고, 앞서 이재웅 대표와 설전을 벌였던 김정호 베어배터 대표의 부친은 택시 운전사였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1조223억원) 역시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혹독한 가난을 맛보았고, 넷마블게임즈 방준혁 대표(1조6000억원 추정)는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성공한 사람들도 저마다의 사연과 어려움이 있었을 테고, 도전정신과 과감한 실행력 등 여러 가지 자질과 능력의 비범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성공 비법을 알려주는 수많은 서사가 보여주지 않는 이면이 있다. 먼저 그들의 성공 뒤에 숨겨진 IT업계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지 않는다. 4차 산업혁명의 주역이라는 화려한 수식 뒤에서 혹독한 야근과 비정상적인 대우에 죽음으로 내몰린 사람들 말이다. 그들 못잖게 성공하고 싶은, 아니 평범한 삶이라도 평온히 살아가길 희망하는 이들의 행복은 어째서 그토록 이루어지기 어려운 구조인지 살피지 않는 성공이란 결국 그 구조를 강화하는 헛된 미담일 뿐이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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