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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막장공천' 파문 기동민 "우린 장기판 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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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천 룰 뒤엔 ‘보이지 않는 손’

지도부 몫으로 후보군 미리 정해

비례대표는 사실상 실세 장난감

정권까지 흔드는 공천 갈등

청와대 개입에 김무성 옥새 파동

비박계 박 대통령 탄핵 동조 불러

호모 여의도쿠스 ③ 공천에 목매는 의원들
중앙일보

기동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14년 7월 8일 7·30 재보선 서울 동작을 후보로 전략공천돼 국회 정론관에서 수락 기자회견을 열자 이에 반발한 허동준 전 동작을 지역위원장(왼쪽 끝)과 지지자들이 난입해 당 관계자들과 육탄전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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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린 장기판의 졸(卒)로 움직인 건데….”

기동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말 끝을 흐렸다. ‘패륜 공천’ 논란이 인 5년 전 일을 회상하면서다.

그는 2014년 7월 8일 서울 동작을 보궐선거(7·30)의 새정치민주연합(민주당 전신) 후보로 공천돼 국회 정론관에서 출마 회견을 열었다. 원래 기 의원은 당시 광주에 출사표를 낸 상태였다. 하지만 당 지도부(김한길·안철수 대표)가 그를 갑자기 동작을로 끌어 올렸다. 기 의원이 박원순 서울시장의 측근인 점을 감안해 ‘박원순 후광효과’를 노린 전략 공천이었다.

하지만 진작부터 동작을에서 터를 닦고 있던 허동준 지역위원장 입장에선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공교롭게도 기 의원과 허 위원장은 친구 관계였다. 당시 허 위원장은 기 의원 회견장에 난입해 “당이 23년 지기의 등에 비수를 꽂게 하는 패륜적 행동을 했다”고 고성을 질렀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정치권에선 “공천 앞에는 친구도, 동지도 없다”는 말이 나왔다. 기 의원은 논란 속에 공천은 받았지만 정작 선거 도중 노회찬 정의당 후보 지지를 선언하면서 후보직을 사퇴했다. 노 후보도 나경원 새누리당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다. 결국 정치공학적 계산에서 시작된 ‘패륜공천’ 논란은 관련자 모두를 패자로 만든 채 참담하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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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미래당 송파을 박종진 후보가 지난해 5월 25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손학규 위원장 불출마에 관한 발언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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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난해 6월 서울 송파을 보궐선거에 바른미래당 후보로 출마했던 박종진씨는 당내 계파 갈등 때문에 공천 과정에서 혼 줄이 났다. 그는 2017년 7월 바른정당의 인재영입인사 1호로 입당한 뒤 송파을 지역구 출마를 낙점받고 준비왔다. 그런데 바른정당이 국민의당과 합쳐지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국민의당계에서 갑자기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를 송파을 후보로 민 것이다.

박 씨는 “국민의당계는 서울 보궐선거 두 곳(송파을, 노원병)을 모두 바른정당계에 내 줄 수는 없으니 한 명씩 나눠갖자는 식으로 나왔다”며 “결국 공천이라는 게 당권 세력이 자기 사람을 심는 과정이라는 것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계파간 힘겨루기가 이어지면서 결국 손 전 대표가 후보등록 마감일인 5월 25일 불출마를 선언할 때까지 박 씨는 선거운동을 하지 못했다.

박 씨는 “마감일 오후 4시에 야 등록을 했다. 그 뒤부터 열심히 뛰었지만 이미 게임은 끝난 상태였다”며 “낙선 결과가 나오자 그때서야 국민의당계 인사들이 ‘공천때 미안했다’고 전화가 오더라. 허탈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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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2016년 3월 24일 서울 은평을 등 5곳에 대한 공천 의결을 거부하고 부산으로 가자 친박계 최고위원들이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원내대표실에 모여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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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의원 변신에…한국당 “공천 행보냐”


공천은 ‘호모 여의도쿠스’의 판단과 행동을 규정하는 절대적 기준이다. 한국 선거에선 후보 개인 능력보단 당의 브랜드 파워가 압도적이다. 특히 후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면서 기호만 보고 찍는 경향이 강한 영ㆍ호남은 물론, 수도권 역시 소속 정당이 중요하다.

그러다보니 당의 공천을 받을 수 있느냐는 ‘호모 여의도쿠스’의 정치생명과 직결된다. 그래서 낙선보다 낙천이 더 무섭다는 말도 있다. 현역 의원이나 원외인사 모두 공천권을 행사할 당 지도부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시스템이다.

이와 관련해 정치권에선 최근 자유한국당 소속 A 의원의 행보가 화제다. 정책적 전문성을 인정받아 20대 국회에 비례대표로 입성한 A 의원은 지난 2년간 정책에 무게를 둔 활동을 했다. 중도적 목소리를 많이 내 당내 골수 지지층의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젊은층의 박수도 함께 받았다.

그랬던 그가 요즘 민주당을 향해 날선 발언을 쏟아내 뉴스에 오르는 일이 부쩍 늘었다. 한국당 관계자는 “본인이 의도했든, 안 했든 당의 색깔에 맞춰 주목 받는 위치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내년 총선 공천 심사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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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의원이 2016년 3월16일 총선 공천에서 떨어지자 기자들 앞에서 탈당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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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천은 호모 여의도쿠스의 모든 것


실제로 21대 총선이 다가오면서 의원회관 주변에는 벌써부터 공천과 관련한 여러가지 루머가 떠돌기 시작했다. PK(부산·경남)에서 다선을 노리는 한 야당 의원의 보좌관은 “지역구에서 공천을 노리는 원외인사들은 공천심사때 현역 의원들에 대한 흠집 내기를 시도해 역전을 노리기 마련”이라며 “네거티브 공격 소재를 미리 파악했다가 터지면 바로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에 들어갔다”고 전했다.

당 지도부에게 공천은 당내 세력 질서를 일거에 뒤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권력의 속성상 당권을 쥔 측에선 공천때 가급적 자기 사람을 많이 꽂으려는 욕심을 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게 지나치면 파국을 부른다. 새누리당(한국당 전신)의 20대 총선 공천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당 대표였던 김무성 의원의 최측근이었던 장성철 전 보좌관의 전언이다.

“공천을 앞둔 2016년 2월 청와대와 연락책을 자처한 B씨가 찾아와 ‘청와대의 뜻’이라며 공천을 해서는 안 되는 살생부 명단을 전달했다. 명단엔 이재오 의원을 비롯해 유승민·정두언·김용태·조해진·김세연·김학용·김성태·박민식·홍지만 의원 등등의 이름이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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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내 살생부 논란이 일자 김무성 대표(가운데)는 최고위원회의에서 "그 누구에게도 공천과 관련된 문건, 살생부 운운한 바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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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한 공천, 정권 몰락까지 연결


대부분 친박계와 마찰을 빚던 인사들이었다. 실제로 이들중 상당수는 공천을 못받았고, 받더라도 공천 과정에서 상당히 애를 먹었다. 명단에 들어있었던 박민식 전 의원은 “당시 당 지도부가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해 나에게 울며 겨자먹기로 공천을 줘야 할 상황에 이르자 ‘뭔가 흠이 있다’는 식으로 공천을 계속 미뤘다”며 “후보자의 울타리가 돼야 할 당이 훼방꾼 역할을 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박 전 의원은 결국 부산 북·강서갑에서 민주당 전재수 후보에게 패배했다. 박 전 의원은 “그때 청와대는 비주류까지 다 끌어모아 190석을 얻느니 차라리 말 안 듣는 의원 20명을 자르고 170석을 얻는게 더 낫다고 봤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김무성 대표는 친박계의 ‘5개지역 공천안’에 대해 당 대표 직인 찍기를 거부하며 부산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이른바 ‘옥새 투쟁’이었다. 대구에서는 ‘진박 후보’ 논란까지 벌어졌다. 당 내부 갈등에 염증을 느낀 새누리당 지지층은 상당수가 지지를 철회했다. 새누리당은 한때 180석까지 차지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지만 뚜껑을 열자 민주당에 이어 2당(122석)으로 전락하는 충격적 패배를 당했다.

공천 과정에서 친박계와 원수가 된 비박계의 다수는 이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찬성 그룹에 합류했다. 한국당 내부에선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이 무리한 친박 공천만 하지 않았어도 탄핵까지 갔겠느냐”는 얘기가 나온다. 결국 무리한 공천이 정권의 몰락을 가져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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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한나라당 대선후보가 현충일인 2002년 6월6일 여의도당사에서 열린 중앙당 서울시 선대위 연석회의장에 들어서며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후보와 악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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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천, 지도부의 ‘보이지 않는 손’이 좌우


이런 공천 과정을 지켜 본 ‘호모 여의도쿠스’의 두려움은 상당하다. 민주당에서 당직자를 지냈던 한 의원은 “공천은 사실상 지도부가 전략적으로 주문생산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왔다”고 주장했다. 당 대표, 원내대표, 최고위원 등 지도부 몫의 후보군을 미리 정해놓고 공천이 진행됐다 것이다. 그는 “여론조사도 지도부의 뜻대로 조작이 가능했다”며 “진성당원을 토대로 한 명단으로 모집단을 유리하게 만드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당이 아무리 공정한 룰에 따른 공천을 강조한다고 해도 결국 지도부의 ‘보이지 않는 손’이 결과를 좌우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유성엽 민주평화당 의원은 2008년 18대 총선 당시 통합민주당 공천에서 컷오프(공천 배제)돼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유 의원은 당시 상황에 대해 “당시 지도부가 시스템 공천, 당원 공천 같이 거창한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막상 보면 컷오프 뒤에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을 정도로 공천이 뒤죽박죽이었다”고 비판했다. 당시 당내에선 유 의원이 해당 지역구에 측근을 공천하려는 김원기 전 국회의장의 반대에도 출마 의사를 고수하자 '괘씸죄' 때문에 떨어졌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유 의원은 당선 후 복당을 신청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비례대표, 호주머니에 든 장난감 같다”


특히 객관적 기준이 없는 비례대표 공천은 요지경이다. 한 여권 인사는 “순번대로 실세가 미는 사람들을 줄 세우는 비례대표 공천은 사실상 사천(私薦)에 가깝다”며 “비례대표 후보들은 당 주류측의 호주머니에 든 장난감 같다”고 말했다.

공천이 소속 정당의 승리가 아니라 내부 정적을 제거하는 칼로 쓰였다는 얘기도 나왔다. 18대 국회의원을 지낸 한 야당 인사는 “19대 총선을 앞두곤 현역임에도 컷오프가 됐는데 사전에 만들어 놓은 공천 룰이 별 소용이 없었다”며 “물갈이 공천, 개혁 공천이라는 이름으로 칼질을 당했다”고 억울해 했다.

공천 결과가 ‘호모 여의도쿠스’의 민낯을 드러내는 경우도 많다. 장성철 전 보좌관은 “김무성 전 대표에게 언제나 고개를 숙이던 사람들이 2016년 총선에서 공천에서 떨어지자 곧바로 안면을 바꾸면서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달려들었던 게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만 해도 2016년 20대 총선에서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공천에서 배제하자 탈당해 버렸다. 결국 무소속으로 세종시에 출마해 당선 후 당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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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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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공천하자, 나만 빼고”


공천에 대한 의원의 공포는 이중적인 심리가 작용한다. 한국당의 고위 관계자는 “요즘 의원들을 만나면 누구나 개혁 공천, 물갈이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며 “다만 여기에는 ‘나만 빼고’라는 전제가 깔려있다”고 말했다. 특히 한국 정치에선 ‘물갈이’가 절대적 선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지도부가 특정 인사를 내려꽂는 전략공천이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과거 사례를 보면 당 지도부의 공천이 나쁜 결과만 도출한 건 아니다. ‘보스 정치’의 막바지 시기인 1996년 총선에서 신한국당이 수도권에서 이명박ㆍ이회창ㆍ이재오ㆍ홍준표ㆍ김문수 등의 새 얼굴을 내세워 승리한 게 대표적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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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6일 4·13 총선을 앞두고 당시 새누리당 대구경북권 선대위원장이던 최경환 의원(왼쪽 네 번째)이 대구 달서구 두류공원에서 대구지역 후보자들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새누리당 공천 파동을 사죄하고 지역 경제 발전의 공약 이행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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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거리 밀실 공천 극복해야”


다만 전문가들은 현재의 공천 제도와 공천 문화에는 반드시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여야 당 지도부가 시스템 공천을 주창하지만 이건 조작된 시스템”이라며 “당 지도부에선 늘 개혁 공천이란 미명 하에 정적을 제거하고 자기 사람을 심는 잔혹한 정치사를 써 왔다”고 지적했다. 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연구소장은 “공천 논란은 문제가 있는 후보자를 냈다는 인식을 심어주게 돼 개별 지역 뿐 아니라 정당 전체에 악영향을 준다”며 “패거리 밀실 공천의 행태를 극복하고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국민에게 공천 과정을 다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김경희·한영익·윤성민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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