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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끈 이강인, 뒤에서 민 정정용… 축구에 푹 빠졌던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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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20 밀레니엄 세대의 유쾌한 ‘반란’/이강인이 손흥민과 합을 맞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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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현지시간) 폴란드 우치 경기장에서 열린 2019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 결승 한국과 우크라이나의 경기에서 패한 한국 이강인 등 선수들이 관중석을 향해 박수를 보내고 있다. 우치=연합뉴스


거의 한달 동안 U-20월드컵 축구에 푹 빠져 지냈다. 추락하는 경제와 극심한 정치·사회 갈등으로 ‘배드 뉴스’만 난무하는 속에서 U-20대표팀의 불꽃 투혼은 가뭄 끝에 단비 같았다. 무엇보다 밀레니얼 세대의 당당하게 ‘즐기는 축구’는 인상적이었다. “뭐하러 울어요. 전 후회 안합니다.” 결승전에서 진뒤 ‘축구 천재’ 이강인(18·발렌시아)의 소감이다. 통상 큰 경기에서 지고난 뒤 눈물 흘리던 이전 대표팀 선수들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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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인의 자로 잰 듯한 ‘택배 패스’는 여태껏 봐온 한국 축구와는 클래스가 다르다. 7경기 2골 4도움. 대표팀이 넣은 9골 중 6골은 그의 왼발에서 나왔다. 성인국가대표팀 코칭스태프도 이강인의 빠르고 정확한 패스는 특출나다고 인정한다. 물 흐르듯 유연한 마르세유 턴(Marseille Turn·드리블 중 순간적으로 몸을 회전하며 수비수를 따돌리는 기술)과 상대 선수 2∼3명의 거친 압박을 절묘하게 빠져 나가는 걸 보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우리도 기술축구를 할 수 있구나”라는 희망을 봤다. 준우승에 그친 아쉬움은 이강인의 골든볼 수상으로 달랬다. 이강인이 성인대표팀에서 손흥민·황의조·백승호와 호흡을 맞추면 어떤 시너지가 날까. 상상만 해도 흐뭇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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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 4강 신화를 이끈 박종환 감독의 대표팀은 비장했다. 고지대인 경기장에 적응하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훈련하다 호흡 곤란으로 쓰러지는 선수가 속출했다. 기술이 상대에 못미치니 체력을 바탕으로 공격 가담 인원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벌떼 축구’로 승부를 걸었다. 개인기는 배제하고 ‘전원 공격-전원 수비’ 팀 플레이를 우선했다. ‘스파르타식’ 훈련이 불가피했다. 4강에 오른 뒤 선수들은 탈진한 채 라커룸에서 서로 껴안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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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현지시간) 폴란드 우치 경기장에서 열린 2019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 결승 한국과 우크라이나의 경기. 후반 한국 정정용 감독이 1-2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라운드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우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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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현지시간) 폴란드 우치 경기장에서 열린 2019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 결승 한국과 우크라이나의 경기. 한국 정정용 감독이 이강인에게 무언가 주문하고 있다. 우치=연합뉴스


U-20대표팀은 너무 달랐다. 정정용 감독은 선수들 개성을 존중한다. 선수들은 두 살 어리지만 기량이 출중하고 시야가 넓은 이강인을 ‘막내형’으로 부른다. 운동장에서 만큼은 그의 카리스마를 인정하고 경기 흐름을 이끌게 한다. 포르투칼, 아르헨티나 같은 강호들과 붙어도 주눅들거나 긴장하지 않았다. “더 즐기기위해 이긴다”라고 말한다. 승부차기에서 실축한 선수를 위로하고, 동료를 탓하는 대신 다독였다. 교체 멤버는 후보가 아닌 특공대다. 천신만고 끝에 4강에 올랐지만 울기는커녕 선수들은 감독에게 물세례를 퍼붓는 장난을 쳤다. 이전엔 볼 수 없던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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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현지시간) 폴란드 우치 경기장에서 열린 2019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 결승 한국과 우크라이나의 경기. 한국 이강인이 넘어져 있다. 우치=연합뉴스


2017년 5월 출범한 ‘정정용호’를 주목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이강인을 제외하면 스타가 없다. 21명 중 6명은 K리그 2부 소속이고, 대학생이 2명이다. 그래서 황금세대 사이에 낀 ‘골짜기 세대’로 평가절하됐다. 감독과 코치진도 무명이었다. 정 감독이 ‘꾸역꾸역 앞으로 나가는 팀’이라고 말한 이유다. 하지만 소통, 콘텐츠, 체력이란 ‘비장의 카드’가 준비돼 있었다. 정 감독은 권위를 내려놓고 수평적 리더십을고 밀레니엄 세대와 소통했다. 훈련장, 라커룸에선 신나는 음악이 흘러 나왔다. 자율 속에서도 규칙과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경기에 한번도 못뛴 선수들도 목청껏 응원했다. 선수단은 ‘원 팀’(One Team)이 뭔지 말과 행동으로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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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현지시간) 폴란드 우치 경기장에서 열린 2019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 결승 한국과 우크라이나의 경기. 한국 응원단이 페이스페인팅을 한 채 태극기를 들고 응원전을 펼치고 있다. 우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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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MVP” 2019 FIFA U-20 월드컵 골드볼에 선정된 한국 축구대표팀 이강인이 16일 폴란드 우치 경기장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우치=연합뉴스


콘텐츠는 ‘마법 전술노트’였다. 여기엔 상대의 전술과 경기 운영 방식에 따른 우리 팀의 포메이션과 세트피스 전술 등이 빼곡히 담겼다. 상황 별로 선수들 위치와 역할, 동선을 자세하게 정리했다. 선수들은 7개월 전부터 반복해 읽고 실전을 통해 숙지했다. 이런 탓에 에콰도르와의 경기 후반 28분 이강인을 교체하고, 골잡이 조영욱을 선발에서 빼도 전력 공백이 느껴지지 않았다. 체력 훈련도 준비돼 있었다. “상대보다 1.5배 이상은 뛸 수 있어야 한다.” 고강도 훈련에 이강인은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12년간 유소년 선수를 지도해 온 정 감독은 ‘어린 선수는 지시가 아니라 이해를 시켜야 한다’고 했다. 강압적이지 않더라도 선수들 스스로 최선을 다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면 좋은 결과는 따라온다고 말한다. 모든 선수가 제몫을 100% 하지 않았다면 결승행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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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달성한 축구대표팀 환영행사가 17일 서울광장에서 열렸다. 이강인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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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감독은 대회가 끝난 뒤 “기회가 된다면 좀 더 큰 무대를 접하라”고 조언했다. 한국 축구의 기념비적인 이강인의 골든볼 수상은 스페인이란 큰 무대에서 치열하게 경쟁한 덕분이다. “이강인이 선·후배 사이가 엄격한 국내에서 성장했다면 형들 사이에서 마음껏 플레이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어느 축구인의 지적은 아직도 유효하다. 큰 물에서 놀아야 큰 선수가 도니다. ‘슈퍼 스타’ 손흥민은 16살에 독일로 유학 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선수로 우뚝 섰다. 그 나라 언어를 배운 것이 감독과의 소통은 물론 기량 향상에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국내파’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을 만난 뒤에야 세계 무대를 밟고 월드 스타가 됐다. 진정한 축구 강국이 되려면 잠재력있는 선수들을 큰 무대로 더 많이 진출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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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대표팀이 16일 폴란드 우치스타디움에서 열린 2019 FIFA U-20 월드컵 결승전에서 우크라이나에 1-3으로 역전패해 아쉽게 준우승에 그친 뒤 메달을 목에 걸고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우치=연합뉴스


U-20팀 준우승으로 이젠 올림픽 금메달, 성인대표팀 월드컵 우승 같은 꿈을 꿀 수 있게 됐다. ‘골짜기 세대’를 황금세대로 만드는 건 축구인들의 몫이다. 이번 대회 성공 비결을 잘 분석해 한국 축구가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들자. 긴 안목을 갖고 유소년 축구에 대해서도 적극 투자해야 한다.

채희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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