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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10세 아동 성범죄에도…폭행·협박 인정범위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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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죄 '폭행·협박' 최협의설 30년 이상 유지

여전히 '극도로 저항한' 피해자만 보호

겁먹고 자포자기 상태면 '강간' 아닌 '간음' 판단

CBS노컷뉴스 정다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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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성인 남성이 10세 아동을 성폭행한 사건에서 재판부가 폭행·협박의 범위를 좁게 보고 강간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30년 이상 여성계를 비롯해 법조계에서도 강간죄의 구성요건인 '폭행·협박'이 실제 성폭력 현실을 담지 못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던 상황이라 논란은 더욱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고법 형사9부(한규현 부장판사)는 성폭력처벌법상 '13세 미만 미성년자 강간' 혐의로 기소된 이모(35)씨에게 징역 8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3년을 선고했다.

형량이 대폭 줄어든 것은 2심 재판부가 "폭행이나 협박을 하지 않았다"는 피고인의 주장을 받아들여 강간죄는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13세 미만 아동과 성관계 시 폭행·협박이 없었더라도 강간으로 인정하는 '의제강간' 혐의를 적용했다.

선고 내용에 따르면, 재판부는 사건 당시 피고인이 피해자를 몸으로 누른 행위가 피해자의 반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이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법원이 35세 남성과 10세 아동 사이의 폭행·협박마저 이처럼 엄격하게 해석하게 된 것은 30년 이상 지속된 강간죄의 폭행 또는 협박에 대한 '최협의설' 때문이다.

대법원은 1992년 4월 14일 선고된 강간치상 사건에서 "간음 당시 폭행이나 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까지 이른 것이라고 보기는 미흡하다"며 원심 판결을 파기 환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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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사건의 가해자는 평소 알고 지내던 피해자에게 '소리를 지르면 칼을 가져와 죽여버리겠다'고 반항을 억압한 후 성관계를 맺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사건 당시 피해자와 피고인이 강간 상황으로 보이지 않는 대화를 나눈 점 등을 근거로 들며 강간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해당 판결 전에도 1998년 11월 8일 선고된 강간치상·상해치사 사건, 1983년 7월 24일 선고된 강간치상 사건 등이 같은 내용을 판시하고 있다. 1970년대 판결에서도 "강간죄에 있어서의 폭행 또는 협박은 피해자의 반항을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것이어야 한다"는 최협의설을 택하고 있다.

이에 대해 여성계는 물론이고 법조계에서도 최협의설은 사실상 강간 상황에 놓인 여성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2001년 '아내강간의 성부와 강간죄에서의 폭행, 협박의 정도에 대한 재검토' 논문에서 "여성의 '필사적 저항'이 있으면 강간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왜곡된 관념의 소산"이라며 "미국에서도 1974년 이후 대다수 주 형법에서 '저항요건' 자체를 폐지했다"고 밝혔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2006년 '성폭력을 조장하는 대법원 판례 바꾸기 운동'을 전개하고 첫 주제를 '폭행·협박 최협의설 비판'으로 잡기도 했다. 당시 조인섭 변호사는 "(현행 최협의설은) 폭행·협박에 겁을 먹고 자포자기 상태로 간음을 단한 경우에는 '극도로 저항을 하지 않았기에' 강간에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보게 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2000년대 들어 대법원이 강간죄의 보호법익을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이라고 판시했는데도 최협의설을 유지하는 것은 더욱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원치 않은 성관계를 하지 않을 자유'이기 때문에 폭행·협박의 정도와 관계없이 보호돼야한다는 것이다.

이번 항소심 판결 이후 조현욱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은 "평소 아동을 가르치는 보습학원 원장이, 채팅 어플로 10세 아동을 집으로 유인해 소주 2잔을 먹인 뒤 강간한 사건"이라며 "법정형 중 가장 낮은 3년형을 선고한 것은 사실관계나 법리를 넘어 양형에서조차 납득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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