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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문예창작과 박사의 고백 “나도 대필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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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김경주 시인ㆍ차현지 작가 대필 사건에 이어 폭로

“대필은 학위ㆍ등단ㆍ문예지ㆍ인맥의 4중 카르텔이 작동하는 구조적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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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는 "창작에는 스승이 없다지만, 권력을 무기로 선생이 학생을 착취하는 지금의 구조는 오히려 문학발전에 해악을 끼친다"고 꼬집었다. 사진은 익명을 요구한 A씨의 허락을 받아 촬영한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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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문단은 중견 문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김경주(43) 시인의 대필 사건으로 들썩였다. 김 시인이 2016년 발표한 미술 비평이 그의 제자인 차현지(32) 작가가 쓴 글이었다는 사실이 차 작가의 폭로로 뒤늦게 밝혀지면서다. 추문은 ‘김경주 사건’으로 일단락되지 않았다. 스승과 제자 혹은 선배와 후배 문인 사이의 대필 관행이 문단의 공공연한 비밀이라는 의혹이 잇달아 제기됐다.

현직 대학 교수이자 문예창작을 전공한 A씨는 최근 한국일보에 자신의 과거 대필 이력을 고백하는 이메일을 보내 왔다. “문예창작과 박사학위 과정 당시 지도교수 B씨의 논문을 대필해 줬다”는 내용이었다. A씨는 대면 인터뷰에 응했다. 단, B씨의 학계와 문단 그리고 지역사회 내 영향력이 크다면서 익명을 요구했다.

A씨가 재직 중인 지방 C대학 인근 카페에서 만나 들은 대필 전말은 이렇다. A씨는 2009년 서울에서 문화콘텐츠 관련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딴 뒤 D광역시 한 E대학의 초빙교수로 부임했다. 사진과 시의 접목에 관심이 있었던 A씨는 인근 대학에 문예창작과가 개설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유명 시인의 애제자로 이름 난 B씨가 전공 교수를 맡고 있었다. A씨는 B씨 밑에서 박사과정을 다시 밟기로 했다.

문예창작과에 처음 발을 들인 A씨가 보기에 문단은 “이상한 위계”가 존재하는 곳이었다. “교수 말이 법으로 통하는 곳이었어요. ‘교수 시켜주겠다’ ‘등단 시켜주겠다’는 말로 희망고문을 하면서 대학원생들에게 잡다한 일을 시켰어요.” 대필 역시 교수의 위력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졌다고 A씨는 주장했다. “2009년 한 학술세미나에서 B교수에게 논문 발표 요청이 들어왔어요. B교수가 저를 불러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이니 네가 대신 좀 써야겠다”고 하더라고요. 200자 원고지 50매에 달하는 B교수의 논문을 한 달에 걸쳐 제가 썼어요.”

B씨는 세미나에서 논문을 자신이 쓴 것인 양 발표했다. 세미나 주최 측에서 지급한 원고료 15만원은 A씨가 받았다. B씨의 갑질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A씨는 해당 세미나가 열린 지역까지 B씨를 수행했는데, 교통비를 비롯한 비용을 A씨가 전부 부담하게 했다.

A씨는 당시 B씨의 대필 요구가 부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고 했다. “박사학위 논문 통과 여부가 B교수에게 달려 있었잖아요. 혹시라도 보복을 당하지 않을지 두려웠던 겁니다.” A씨는 박사학위를 딴 뒤 B씨와 인연을 끊었다. 하지만 A씨가 쓴 논문은 B씨의 이름으로 여러 책자에 수 차례 인용됐다. A씨가 10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사실을 바로잡기로 결심한 것은 얼마 전이다. 그는 B씨의 대학에 내용증명을 보내 놓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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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 문인인 김경주 시인의 대필 사실이 알려지며 대필 관행이 문단의 공공연한 비밀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흑표범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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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는 대필이 자신과 B씨 혹은 김경주 시인과 차현지 작가 등 일부만 저지른 일탈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대필은 현재 진행형인 문단의 구조적 문제”라고 그는 주장했다. “문예창작과 교수의 위력이 학위논문 통과에만 작용하는 게 아니라 작가 지망생 혹은 신인 작가들의 현업까지 연결되거든요. 등단부터 문예지 작품 게재 권한까지 전방위로 교수의 위력이 닿아있어요.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게 이 바닥의 고질적인 문화예요. 학위를 따고 졸업한 뒤에도 계속 교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만드는 거죠. 더구나 문단은 ‘양질의 글쟁이’가 널려 있는 곳이에요. 대필이 만연할 수밖에 없어요.”

B씨는 자신이 주간을 맡은 문예지에 등단시켜 주는 방식으로 대학원생들을 관리했다고 A씨는 폭로했다. A씨 역시 해당 문예지를 통해 “허울뿐인 등단”을 했다. A씨는 외로운 싸움을 시작하는 참이다. B씨에게 비슷한 피해를 당한 지인들에게 함께 공론화에 나서자고 했지만, 모두 “무섭다”며 거절했다. “’무섭다’는 말 자체가 증명하듯, 단순히 학생과 교수의 관계가 아니에요. 졸업한다고 글 쓰는 일을 그만둘 건 아니니까요. 선생이 학생을 착취하는 지금의 구조는 문학 발전에 해악을 끼칠 뿐입니다.”

한국일보는 B씨의 입장을 듣기 위해 연락을 취했으나, 그는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