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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코리아] 미·중 사이에서 ‘임도 보고 뽕도 따는’ 시대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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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현안마다 우유부단한 한국

불신 누적돼 양자택일 강요받아

중앙일보

이성현 세종연구소 중국연구센터장

국회에서 미·중 무역 전쟁을 주제로 강의한 적이 있다. 전 정부의 집권당 당대표 등 국회의원이 많이 참석했다. 모임을 주관한 국회의원이 시의적절한 주제라고 소개했다. 의원들의 관심은 “한국은 미·중 사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으로 요약됐다. 내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췌장암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자각 증세가 없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병원에 가면 ‘손 쓰기 늦었다’는 말을 듣는다. 미·중 무역 전쟁도 마찬가지다. 시의적절한 주제가 아니다. 많이 늦었다.”

첫째, 미·중 무역전쟁의 본질은 ‘무역전쟁’이 아니라 미래를 둘러싼 ‘패권전쟁’이다. 미·중은 이데올로기·세계관이 다른 두 문명이다. 무역을 통한 공동 이익 창출은 지금까지 충돌을 막아준 방파제였다.

우리는 지금 그 안정을 지탱해준 둑이 무너지는 걸 보고 있다. 앞으로 무역뿐 아니라 대만·남중국해·티베트·사이버 해킹·인권·북극해·5G·인공지능·북한 등 기술과 안보, 체제 문제로까지 전면전 양상으로 갈 것이다.

둘째, 미·중 무역전쟁은 ‘봉합 후 악화’ 그리고 ‘다시 봉합 후 다시 악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면서, 전체적으로 하향 평준화 포물선을 그리는 장기전이 유력하다. 그 기간은 한 세대 이상이 될 것이다. 미·중 협상은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게 아니라 어떻게 이혼(de-couple)하느냐의 수속 과정이라 봐도 좋다.

셋째, 일반 예측과 달리 중국은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무역전쟁 초기 많은 전문가가 중국의 조기 항복을 예상했다. 이는 중국이 가진 ‘야망의 크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엔 중국 고전에 능통한 대가들이 많지만, 중화인민공화국 읽기에는 취약하다. 중국은 트럼프의 미국을 기울고 있는 패권국으로 보고, 현재를 미국 추월의 ‘전략적 기회의 시기’(戰略機遇期)로 본다. 지금 세계가 ‘100년만의 대변혁기 (百年未有之大變局)’에 있다는 시진핑의 말엔 ‘국운 상승’ 기회를 확실히 중국 쪽으로 추동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무역전쟁에서 단기적으로 밀리겠지만, 장기적으로 ‘시간은 우리 편’이라 믿는다.

넷째, 미·중 관계 악화로 한국은 입지가 가장 어려운 국가가 될 것이다. 한국에 가장 이상적 옵션은 미국과도, 중국과도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란 말이 그래서 나왔다. 그러나 미·중 사이에서 ‘임도 보고 뽕도 따는’ 패러다임은 이미 끝났다. 차선은 선택을 안 해도 되는 상황이다. 최악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는 것이다. 한국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수년간 미·중의 주요 이슈인 일대일로(一帶一路), 남중국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사드, 인도·태평양전략, 화웨이 등 현안마다 한국은 우유부단하게 눈치를 보다 민첩하게 기회를 낚아채지 못했다. 양쪽에 제대로 로맨스를 살리지 못한 채 ‘바람둥이’란 낙인이 찍혔다. 미·중의 한국 불신은 수년간 누적되며 미덥지 못한 파트너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한국 외교부 장관은 2015년 미·중 양쪽으로부터 ‘러브 콜’을 받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랬다가 이제 와 정조를 지키겠다고 치마끈을 동여매는 모습을 미·중이 어떻게 볼까.

다섯째, 앞으로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때보다 더욱 힘든 시기를 겪을 수 있다. 경제뿐 아니라 안보 문제가 중첩되었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주변 강대국의 ‘세력 전이’ 과정에서 취약했다. 한국의 선택은 존중받지 못하고 선택을 강요받았다. ‘미·중 사이 한국의 선택’ 문제는 향후 한국 사회에서 가장 분열적 담론으로 등장할 수 있다. ‘지금은 구한 말이 아니다’는 말로 위안이 되지 않는다.

이성현 세종연구소 중국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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