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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외국인노동자, 난민, 탈북자…약자 인권에 진보·보수가 어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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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이호택·조명숙의 난민 돕기 20년

국내 난민 엔지오인 ‘피난처’

20년 전 설립한 이호택 대표

“난민은 불 피해서 온 사람들

머물 동안 환대하는 게 현명

난민은 우리 사회 기여하면 돼”

탈북청소년 위한 ‘여명학교’ 세워

탈북난민 돌보는 조명숙 교감

“보수정권은 탈북자 이용만 하고

진보정권은 아예 관심이 없어

남북평화와 북 인권 병행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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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는 20일은 난민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유엔이 정한 ‘세계 난민의 날’(World Refugee Day)이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등록된 전세계 난민 수는 1500만명(2015년 기준)을 넘었다. 우리나라도 지난해 난민 신청자가 1만6천명을 웃돌았지만 난민 인정을 받은 사람은 144명에 불과했다. 세계적 수준의 난민 포용 국가가 되려면 갈 길이 멀다. 난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없었던 1999년부터 국제난민지원단체인 ‘피난처’를 만들어 20년 동안 난민을 도와온 부부가 있다. 피난처의 이호택 대표와, 탈북 청소년을 위한 ‘여명학교’의 조명숙 교감이 그들이다. 이들은 1990년대 초반부터 외국인 노동자와 탈북자, 난민 등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약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돕는 삶을 살고 있다. 두 사람을 지난 10일 오후 서울 동작구 상도동 ‘피난처’ 사무실에서 3시간 넘게 만났다. 11일과 12일 오전에도 각각 여명학교와 피난처에서 추가 인터뷰를 했다.



긴 탁자 위에는 촛불을 꽂은 앙증맞은 케이크 하나만 놓였다. 좁은 방 안에 둘러선 20여명이 목소리를 맞췄다. “해피 버스데이 투유~” 노랫소리가 12일 오전 10시 서울 상도동 장승배기 근처 산꼭대기에 있는 작은 집에서 울려퍼졌다. 케이크 옆에는 ‘20 난민들의 피난처’라고 쓴 글자판이 놓여 있었다. 노래를 부른 뒤에는 세계 각지에서 보내온 축하 영상을 함께 봤다.

“‘피난처’가 출범한 지 스무해가 돼 조촐한 자리를 마련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자.” 난민을 돕는 비정부기구(NGO·엔지오)인 ‘피난처’(www.pnan.org)의 대표 이호택(60)이 우리말과 영어로 짧게 인사했다. 그의 동반자이자 피난처 이사인 조명숙(49)이 말을 받았다.

“피난처가 설립된 지 벌써 20년이라니 감격스럽다. 세계 각지에서 힘들게 여기까지 온 난민분들이 이곳에서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 여러분들이 가진 문제를 우리가 다 해결해줄 수는 없지만, 친구는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신분 노출을 꺼려 그때까지 뒷자리에 머물러 있던 난민 신청자 대여섯명이 앞으로 나아갔다. 이들은 이호택과 조명숙, 피난처 직원들에게 축하와 함께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부부이자 오랜 동지인 이호택과 조명숙은 이들에게 눈 맞춰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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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처’ 정체성을 알려준 쿠르드 난민

피난처는 이호택이 1999년 6월11일 인터넷에서 첫 자리를 폈다. 한해 전인 1998년에 문을 닫은 외국인노동자들을 지원하는 단체 ‘외국인노동자피난처’에서 이름을 따왔다.

“솔직히 처음에는 우리나라에 외국인 난민들이 있는지도 몰랐다. 당시까지 난민이 우리 사회에서 이슈가 된 적이 없었으니까. 외국인노동자나 탈북자 등 법률적인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겠다는 막연한 생각에서 피난처를 만들었는데 이듬해인 2000년초 쿠르드인이 홈페이지를 통해 ‘난민 신청이 기각됐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들을 도우면서부터 난민의 존재를 알게 됐고, ‘이게 내 사명이구나’ 깨달았다.”(이호택)

“지금은 난민을 돕겠다는 사람들이 그래도 더러 있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없었다. 난민의 아픔을 알았기에 우리까지 안 하면 안 되니까 우리라도 돕자고 한 게 20년이 넘었다.”(조명숙)

당시 쿠르드 난민 3명이 피난처의 도움으로 2002년 6월 난민은 아니지만 ‘일시적인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았다. 피난처로서는 2년에 걸친 노력 끝에 얻은 첫 결실이었다. 피난처는 이후 2003년 버마(현 미얀마)의 민주화 투사들인 ‘버마민주화모임’ 소속 인사 3명, 2004년 방글라데시 소수민족인 줌마족 12명 등이 법적인 난민 지위를 얻는 데도 기여했다. 피난처는 난민 지위 인정을 받기 위한 이들의 소송을 도울 뿐 아니라 임시숙소를 운영하면서 말 그대로 일시적인 피난처 구실도 하고 있다. 현재 30여명의 난민 신청자가 피난처가 제공한 숙소에 머물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2년에 유엔 난민협약에 가입은 했지만, 2001년이 돼서야 첫 난민 인정자(에티오피아인 한명)가 나왔다. 지난해 난민 신청자 1만6173명 가운데 144명(0.9%)만이 난민으로 인정받았을 정도로 난민 인정률도 여전히 낮다. 지난해 제주도 예멘 난민 사태 때 이들에 대한 혐오감을 담은 청와대 청원서에 많은 사람이 서명한 데서 보듯 우리 사회의 난민에 대한 편견과 거부감은 아직 강하다.

“우리도 일제시대에는 전부 난민이 아니었나. 한국전쟁 때도 국제사회의 은혜를 입었다. 이제는 우리가 갚아야 할 때다. 난민을 부담으로만 여기지 말고, 우리의 이웃으로 잘 대우하면 좋겠다. 이들은 상황이 안정되면 대부분 자기 나라로 돌아갈 사람들이다. 그러면 그들이 결국 한국통이 된다. 꼭 그런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더라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국가의 도덕 수준과 국격을 높이는 일이다.”(조명숙)

“난민은 우리가 받아서 들어온 사람들이 아니다. 자기가 살던 곳에 불이 났기에 황급히 떠나온 사람들이다. 있는 동안이라도 환대해서 친구로 만드는 게 지혜롭기도 하고 윤리적이기도 하다. 난민을 너무 무겁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대신 그들도 한국 사회에 기여하도록 하면 된다. 난민을 우리가 품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일부 국민들의 반감을 혐오감이라고 몰아붙이는 것 역시 현명하지 못하다. 그런 부정적인 정서는 어차피 한번은 거치면서 이겨내야 할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난민 아닌 사람들이 악용할 소지가 있는 규정은 난민법에서 고치는 것이 맞는다고 본다.”(이호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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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바꾼 ‘잘못 걸려온’ 전화

이호택과 조명숙이 만난 건 1994년이었다. 공장들이 밀집된 서울 구로공단이 무대였다. 구로공단에 먼저 발을 내디딘 사람은 조명숙이었다. 조명숙은 대학 3학년(단국대 한문학과)이던 1993년부터 ‘외국인노동자피난처’에서 간사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외국인노동자피난처는 당시에 막 들어오기 시작한 외국인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김모세(가명) 선교사 남매가 1992년에 만든 사회단체였다. 당시 외국인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못했고, 산업재해를 당해도 어떤 보상도 없었다.

“나는 교사를 꿈꾸던 평범한 학생이었기에 아무런 사회의식이 없었다. 1993년 봄 집으로 잘못 걸려온 파키스탄 노동자의 전화 한통이 인생을 바꿨다. 잘못된 번호라고 영어로 말하고 끊었는데 그 사람이 곧바로 다시 전화해서 영어를 할 줄 알면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병원에 갔더니 산업재해를 당한 그의 친구가 누워 있었다.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던 그 다친 사람은 며칠 뒤 숨졌다. 이들은 그 뒤 어려운 일만 생기면 나를 찾았다. 그들을 돕다가 외국인노동자피난처를 알게 됐고, 같이 일하는 게 낫겠다 싶어 자원봉사자로 합류했다.”(조명숙)

조명숙은 대학 졸업 뒤에도 구로공단에서 외국인노동자를 돕는 일을 계속했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전의 서울 상계동 빈민촌에서 첫번째 여대생이었던 그의 선택에 가족이 충격을 받았다. 화난 아버지는 매를 들기도 했다.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어서 2년만 돕고 교사를 하자고 생각했는데 그게 맘대로 안 됐다.(웃음) 그때부터 꼬박 8년을 무급으로 일했다. 빈민촌에서 자라서 하루 한끼만 먹어도 됐고, 돈은 아예 안 쓰고 다녔기에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기에 요즘도 사회운동을 하는 후배들을 보면 마음이 짠해서 ‘밥은 먹었니’라고 늘 묻는다.”(조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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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숙이 구로공단에 발을 들여놓을 즈음 이호택은 오랜 사법시험 도전을 막 포기한 참이었다. 1979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이호택은 학부 때 이른바 지하서클에서 활동한 운동권 학생이었다. 3학년 때부터 변호사를 꿈꾸며 사시 공부를 시작했다. “민주화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택한 길이었다.”(이호택) 하지만 번번이 시험에서 고배를 마셨다.

“더 이상의 도전은 의미 없다는 생각에서 포기했지만, 그 좌절감과 낙담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렇다고 회사에 취직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었다. 변호사가 돼서 모양 좋게 사람들을 도우려던 계획은 구겨졌지만, 법률지식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마침 구로공단에서 외국인노동자 상담을 하던 ‘희년선교회’에서 도와달라는 제안이 와서 갔더니 외국인노동자피난처와 아래위층에서 긴밀하게 협조하며 일하더라. 거기에서 조명숙씨를 만났다.” 공부 잘하고 착하던 둘째 아들이 출세의 길을 포기한 데 이어 취직마저 거부하자, 경찰 출신인 이호택 아버지의 충격도 컸다. 하지만 아들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외국인노동자피난처와 희년선교회는 1990년대 초부터 대거 들어온 외국인노동자의 투쟁사에 맨 먼저 이름이 기록되는 단체다.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산재보상을 최초로 이끌어냈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농성 투쟁(1994년 1월)과 인권침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왔던 명동성당 농성 투쟁(1995년 1월)에 이들이 함께했다. 두 투쟁이 끝난 뒤 이들의 일은 더 많아졌다. 떼인 임금이나 산재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간 노동자들을 직접 찾아나선 것이다.

“산재 보상 소멸시효 3년이 남아 있는 외국인노동자들을 찾으러 각 나라로 흩어졌다. 김모세 선교사 남매는 네팔과 방글라데시로 가고, 조명숙씨는 필리핀, 나는 중국으로 갔다. 한국에서 일했던 외국인노동자들을 만나서 산재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소문내고 다녔다. 당시 그들 사이에 한국에 대한 반감이 아주 심할 때였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 대한 속죄와 정의라고 봤다.”(이호택)

90년대 초부터 구로공단 자원봉사
외국인노동자 돕기로 출발해
조선족, 탈북자 지원으로 이어져
‘아! 굶주리는 북녘’ 보도 이끌어


“가진 것 없어도 늘 즐겁고 감사해
내가 행복해야 운동 계속할 수 있어”
“탈북자·난민에 대한 인식 개선돼와
우리 사회 한발씩 나아가고 있어”


끝내 탈북자 외면한 한 보수신문

1995년 중국 연변 지역을 돌던 이호택은 조선족의 대규모 사기 피해 사건을 접하게 된다. 한국에 입국하기 위해 브로커에게 돈을 건넸다가 떼인 사건이었다. 그는 피해자들을 만나서 꼼꼼하게 기록한 뒤 52건의 고소장을 가지고 돌아왔다.

“처음에 우리 셋(선교사 남매와 조명숙)은 외국인노동자 산재 보상도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왜 조선족 사기 사건까지 손대려 하느냐면서 강하게 말렸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불의한 일을 외면할 수 없고, 법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이런 일을 안 도우면 누가 하겠느냐면서 자기 혼자서라도 하겠다고 밀고 나갔다.”(조명숙)

이호택이 대리인으로 일했던 고소 사건은 대부분 잘 해결됐다. 그러자 중국동포 사회에서는 외국인노동자피난처에 2차 방문을 요청했고, 1996년 겨울 김모세와 이호택은 다시 중국으로 갔다. 이들은 무려 1만여건의 사기 피해 사건을 접수했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이들을 신뢰하게 된 중국동포 몇명이 이들에게 다른 도움을 요청했다. 식량난 때문에 북한을 탈출해 중국을 떠돌던 탈북자들이었다. 탈북자들을 만나 기록한 내용은 믿기 힘들 정도로 처참했다. 국내에 알리는 게 숙제였다. 이호택이 나서 진보신문 한곳(<한겨레>)과 보수신문 한곳에 차례로 제보했다. 1997년 4월 <한겨레>의 ‘아! 굶주리는 북녘’ 시리즈에 이어 ‘북한에 쌀 보내기 운동’이 촉발된 배경에 이들이 있었다.

“한겨레에서는 처음에 난색을 표하더니 며칠 뒤 ‘진실을 알리겠다’면서 연락해 왔다. 반면에 보수신문은 ‘북한 동정론이 나올 텐데 그것은 우리 논조와 맞지 않는다’며 끝내 거절했다. 돌이켜보면 한겨레에서 보도했기에 북한돕기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보수신문에서 했더라면 사람들이 안 믿었을 것이다.”(조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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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와의 만남은 이호택·조명숙의 인생에서 또다른 전환점이 됐다. 1997년 4월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신혼여행으로 중국 항주에서 며칠 머문 뒤 곧바로 연길에 합류해 탈북자 돕기에 나섰다.

“처음 탈북자를 만났을 때 이들이 두려움과 굶주림, 공포 등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결혼반지와 전세보증금 등을 빼 중국에 집을 구한 뒤 탈북자 보호에 나섰다.”(이호택)

“같은 민족인 탈북자들을 대할 때는 외국인노동자를 대할 때보다 훨씬 더 가슴이 뛰었다. 압록강변에 떠 있는 시신들 사진을 찍으러 가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물속에 오랫동안 잠겨 있어서 몸이 퉁퉁 불었음에도 저보다 더 야윈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당시 탈북자를 돕는 일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지만,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몸이 먼저 움직였고, 생각은 나중에 왔다.”(조명숙)

이호택·조명숙 부부와 선교사 남매 4명은 중국 당국의 눈을 피해 탈북자 13명과 함께 여러 곳으로 거처를 옮겨다녔다. 한국대사관에 구조를 요청했지만, “황장엽씨 망명 사건 직후여서 중국이 외교공관들에 대한 경비를 강화해 도울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결국 이들은 1997년 10월말 탈북난민 13명과 함께 베트남 국경을 넘었다. 제3국을 통한 최초의 탈출이었다. 중국과 베트남의 ‘핑퐁난민사건’에 휘말린 끝에, 이듬해 초 그중 한국행을 원하는 11명을 데려올 수 있었다. 그 뒤 외국인노동자피난처는 해산됐고, 이호택은 피난처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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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리더가 아니라 전문가가 돼라”

피난처는 외국인 난민과 함께 탈북난민들도 돌봤다. 탈북자들은 우리 법으로는 난민이 아니지만, 국제적 기준으로는 난민이기에 이들에 대한 각종 도움을 이어갔다. 이들의 남한 사회 적응을 돕기 위해 야간 과정으로 세운 ‘자유터학교’(교장 조명숙)가 대표적이다. 자유터학교에서는 주로 영어와 컴퓨터 등 탈북자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내용 위주로 가르쳤다. 수요가 많아지자, 조명숙은 2004년 여러 후원자의 도움으로 서울 봉천동에 중·고교 과정의 ‘여명학교’(초대교장 우기섭, 교감 조명숙)를 정식으로 열었다. 여명학교는 2008년 명동으로 옮겼고 2010년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고교과정 학력 인정을 받았다. 올해 1학기에는 학생이 77명 등록돼 있다. 이 중 60명은 학교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 머물고 있다. 혼자 한국에 들어왔거나 엄마나 아빠가 있어도 여러 사정으로 가족과 함께 지내기 곤란한 아이들이다.

“여명학교 학생들 중에는 일반학교에 있다가 온 아이들이 약 40%다. 북한과 중국에서 떠도느라 초·중등 과정도 제대로 못 배웠는데 일반학교에 들어가면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다. 우리 학생 중에는 심지어 26살 된 미혼모도 있다. 이런 아이들은 대안학교가 아니고는 가르칠 수가 없다. 사람들은 왜 탈북청소년들끼리 모아놓고 교육하느냐 빨리 적응하게 하려면 남한 친구들과 섞어놓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 아이들은 적응에 앞서 치유를 받아야 하고, 교육보다 위로가 우선 필요하다. 자기들이 한국 사회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조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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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학교는 상처받은 아이들을 잘 돌보기 위해 10명 정도로 한 반을 편성한다. 올해부터는 여명학교 출신의 졸업생 한명이 사회과목을 가르치는 정규교사로 채용됐다. 그는 아이들에게 자연스러운 롤모델이다.

“우리는 학생들한테 통일이 되면 너희가 북한을 이끌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오만한 태도다. 이들이 리더를 자처하면 북한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기분이 상하겠나. 우리는 아이들에게 겸손한 전문가가 되라고 늘 강조한다.”(조명숙)

이호택과 조명숙은 1994년 외국인노동자피난처 시절부터 따지면 25년 동안 같은 길을 걷고 있다. 그들은 “우리는 변하지 않았는데 주변의 시선이 많이 바뀐 것 같아서 당혹스러울 때도 많다”고 했다.

“외국인노동자와 난민을 도울 때는 진보 쪽 사람들이 많이 도와준다. 반면에 북한 인권 문제를 다룰 때는 보수 쪽과 많이 어울린다. 그러다 보니 마치 카멜레온 같다. 그러나 약자의 인권 문제에 진보 보수가 어딨나. 편협된 잣대로 안 봤으면 좋겠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돕는 대상만 외국인노동자에서 탈북자, 난민으로 변했을 뿐이다.”(이호택)

“외국인노동자든 탈북자든 난민이든 우리는 같은 사람으로, 생명 자체로 대할 뿐이다. 그런데 보는 사람들이 자기 관점에서 우리를 평가하는 것 같다. 탈북자만 해도 그렇다. 보수정권이 들어오면 도와주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이들을 이용만 한다. 진보정권은 아예 관심이 없다. 남북교류와 북한 인권 문제가 같이 가야 하는 것 아니냐. 둘을 병행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그것을 양립시키는 게 능력이라고 본다. 남북 평화를 얘기하고 동시에 탈북자 문제 등 인권 문제도 얘기할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조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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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둥지 찾아야 하지만 걱정 안 해”

두 사람은 인터뷰 내내 연신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때로는 파안대소했다.

“외국인노동자를 돕는 일을 시작하면서 결혼할 생각을 다 내려놓았다.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할 생각이 없는 사람과 누가 함께 살려고 하겠나. 그런데 조명숙씨를 만났고, 그와 결혼해서 지금도 신혼 같은 기분으로 살고 있다. 늘 감사하고 행복하다. 기쁨 없이는 이 일을 못한다.”(이호택)

“우리 둘 중에 한명이라도 결혼생활의 안락함이나 풍족함을 기대했다면 아마 6개월도 못 갔을 것이다. 우리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도 늘 즐겁고 행복했다. 사회운동은 결국 다른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데 도움을 주자는 것인데 운동가 스스로가 행복하지 못하면 거짓말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지속할 수가 없다.”(조명숙)

이호택·조명숙이 각각 대학생·고등학생 때부터 가지게 됐다는 기독교 신앙도 이들이 힘든 활동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두 사람에게도 근심과 고민은 있다. 피난처와 여명학교의 새 보금자리를 찾는 일이다. 피난처가 세든 집은 상도동 재개발사업구역에 있어 빠르면 내년 초에 헐린다. 여명학교도 2년 뒤인 2021년에는 계약이 종료돼 새 학교를 구해야 한다. 서울시와 협의 중에 있지만 진척이 느리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뜻이 있는 곳에 늘 길이 있었다. 큰 걱정은 안 한다. 탈북자와 난민에 대한 인식도 많이 개선돼왔듯이 우리 사회가 전체적으로 한발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피난처도 어딘가에 자신의 피난처가 있지 않을까. 여명학교도 잘 풀릴 것으로 믿는다.” 천생 낙관주의자인 이호택이 호탕하게 말했다. 조명숙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난민 국제법(유엔난민협약)과 국내법(난민법)에서 규정하는 난민은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인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어 모국의 보호를 원치 않는 사람’을 뜻한다. 전쟁, 내전, 재난으로 인한 피난민은 법적인 난민에 해당되지는 않는다. ‘난민 인정자’가 되기 위해서는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난민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모국에 돌아갈 경우 생명이나 신체의 자유가 크게 침해당할 수 있는 사람은 ‘인도적 체류자’로 분류해 일시적 체류를 허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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