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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김 빼지마’…경계령에도 늘어나는 ‘스포일러’의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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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본 정보 유포 통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 향상’ 느끼려 난사

“관람 전 흥미 망친다” 눈총 늘어…“알고 보면 더 재미” 의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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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금지’를 당부하는 영화배우 크리스 헴스워스. 월드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왼쪽). 영화 <기생충>에서 박사장네 부부가 귀엣말을 하고 있는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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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을 예매해두고 관람일만 손꼽아 기다리던 직장인 홍모씨(43)는 최근 ‘봉변’을 당했다. 별 생각 없이 야구 관련 기사를 보다가 댓글난에서 영화 결말의 핵심 내용이 담긴 한 줄의 문장을 읽어버린 것이다. 스포일러(Spoiler·영화 등의 내용을 미리 알리는 사람이나 행위)를 피하기 위해 ‘기생충’의 ‘기’자만 보여도, 눈 감고 귀 막았던 그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홍씨는 영화를 보고서도, 완전한 재미를 누리지 못했다는 낭패감에 분통이 터졌다. 바야흐로 ‘스포일러와의 대전쟁 시대’, 패배의 맛은 쓰디썼다.

■ 망치려는 자 vs 막으려는 자

‘전쟁’이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스포일러와 이를 막으려는 이들의 대결 양상이 어느 때보다 뜨겁다. 지난 4월 홍콩 코즈웨이베이의 한 영화관에서는 막 개봉한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보고 나온 한 남성이 결말 내용을 큰 소리로 외치다가 입장을 기다리던 관객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스포일러는 이제 ‘피해야 할 위험’을 넘어 ‘적극적으로 막아야 할 해악’이 됐다. ‘스포일러 주의 문구’가 포함된 기사를 피하는 것만으로 더 이상 이 전쟁에서 안전을 담보받을 수 없다. 기자나 평론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감상평을 적을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영화·드라마 제작사와 홍보사들은 ‘스포일러 전쟁’ 최전선에 선다.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은 개봉 전 보도자료를 통해 “기사를 쓰실 때, 스토리 전개에 대해서 최대한 감춰주신다면 제작진에게 큰 선물이 될 것 같다”며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로 된 부탁의 편지를 기자들에게 보냈다. 앞서 지난 4월 개봉한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앤서니 루소, 조 루소 감독은 편지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인 ‘노 스포일러 캠페인’까지 벌였다. 내용 유출을 막기 위해 촬영 당시 다수의 배우들이 영화의 결말을 모른 채 연기에 임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미국 케이블 채널 HBO의 인기 드라마 <왕좌의 게임>은 시리즈의 최종 결말인 시즌 8에서 여러 가지 버전의 ‘거짓 엔딩’을 촬영하며 ‘철통 보안’을 지켰다.

‘스포일러 주의’는 대중에게도 이미 하나의 예의, 더 나아가 사회규범으로까지 인식된다. ‘몰라서 그랬다’는 변명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회사원 김운영씨(27)는 “<기생충>을 보고 지하철에서 친구와 얘기하다가 주변의 눈총이 느껴져 말을 멈췄다”고 말했다. 같은 영화를 본 김모씨(49)는 “딸에게 무심코 반전 이야기를 했다가 ‘요즘에 그렇게 스포일러 하면 큰일 난다’며 핀잔을 들었다”고 했다. 영화관 주변 식당가에는 ‘식사 중 스포일러를 자제해달라’는 안내 문구까지 나붙고 있다. 이러한 ‘규범화’에 반발하듯, 익명의 힘을 빌려 불특정 다수를 향한 스포일러를 난사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 스포일러 알면 정말 재미없을까

한편으론 의문이 든다. 스포 전쟁, 이렇게까지 뜨거워질 필요가 있을까. 정덕현 영화평론가는 SNS 등의 발달과 더불어 “소비자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아진 시대다보니, 돈을 내고 산 콘텐츠 감상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에 대한 집단적인 비판 의식이 높아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스포일러와 이를 막으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진화심리학을 토대로 설명한다.

그는 “원시시대에는 생존의 필수 요소인 정보를 가진 이들의 사회적 위치가 높았다. 현대에도 이러한 심리가 남아, 영화 내용이라는 사소한 정보라도 다수에게 알림으로써 사회적 위치가 올라가는 듯한 고양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스포일러에 쏟아지는 비판은 집단에 이익은커녕 해를 주는 정보를 통해 자존감을 고양하려는 행위에 대한 제압”이라고 해석했다.

스포일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태도가 영화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방해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덕현 평론가는 “<기생충>의 경우 영화 내용을 세세하게 해부하듯 분석하면 상당히 재미있는 논의가 될 수 있는데, 스포일러 때문에 어려운 점이 많다”면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시점’에 대한 유동적 합의가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스포일러를 알면 정말로 영화가 재미없을까.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있다. 2011년 학술지 ‘심리과학(Psychological Science)’에는 미스터리나 반전을 포함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줄거리를 먼저 읽은 독자들이 더 재미있게 느꼈다는 연구가 실렸다. 익숙한 내용이 갑자기 등장할 때 그 즐거움은 특히 배가된다는 것이다. 이일준 전문의는 이에 대해 “영화의 내용에 따라 다를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반전이 재미의 핵심을 제공하는 영화라면 스포일러를 피하는 것이 좋지만, 얽히고설킨 이야기가 재미를 주는 영화라면 미리 내용을 알고 가는 것이 흥미를 더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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