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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고흐의 다락방, 작은 미술관 만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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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라부 여인숙 앞에 선 도미니크 얀선스 대표.


식품회사 다농 이사로 일하던 도미니크 얀선스(71)는 1985년 7월 21일 프랑스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공교롭게도 네덜란드 출신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생애 마지막을 보낸 라부 여인숙 앞이었다. 고흐는 이 여인숙 다락방에서 70일간 머무르면서 '까마귀가 있는 밀밭' 등 작품 80여 점을 남겼다.

이 우연에 끌린 얀선스는 2개월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고흐의 편지들을 읽었다. 그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운명처럼 고흐 작품을 사랑하게 됐다. 급기야 이듬해 경매에 나온 라부 여인숙까지 인수하게 됐다. 그는 이곳을 제대로 관리하고 싶어 회사를 그만둔 뒤 반고흐재단을 설립했다.

그는 라부 여인숙 운영 모델을 찾고 싶어 세계 유명 작가 기념관들을 찾아다녔다. 오스트리아 작곡가 모차르트, 멕시코 출신 화가 프리다 칼로,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박물관 등을 둘러봤는데, 네덜란드에 있는 안네 프랑크 집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나치 군대를 피해 숨었던 프랑크의 텅 비어 있는 방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고흐가 머물렀던 라부 여인숙 다락방도 침묵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 의자 한 개만 놨다. 6년간 복원 작업을 거쳐 1890년대 모습을 되찾은 후 1993년 개관했다.

서울에 온 얀선스 반고흐재단 대표는 "고흐 방에서 볼 것은 없지만 느낄 것이 많다. 침묵이 밴 공간이다. 주변 환경이 개발로 변하는 게 싫어서 라부 여인숙뿐만 아니라 인근 주택 다섯 채를 구입해 보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한국 방문 목적은 고흐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다. 고흐가 1890년 6월 10일 동생 테오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 '언젠가는 카페에서 나만의 전시회를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란 구절을 현실로 만들려고 한다. 고흐는 미술관이 아니라 호텔이나 학교, 카페, 정원 등 일상적인 공간에 자기 작품이 걸리기를 원했다. 얀선스 대표는 현재 전 세계 사람들에게 1달러씩 기부받아 고흐 방에 걸어 놓을 그림 한 점을 매입하는 '반 고흐의 꿈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목표는 오베르 시절 그린 고흐 작품 중 개인 소장품 14점이다. 나머지 작품은 대부분 미술관에 있어 구입이 어렵다. 얀선스 대표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고흐 미술관을 건립하기 위해 한국을 비롯한 50개국에서 모금 프로젝트를 하려고 한다. 특히 한국인들이 고흐를 사랑해 라부 여인숙을 많이 찾기에 기대가 크다"면서 "최근 한 경매에 올라온 고흐 작품을 매입해 꼭 그의 꿈을 이루고 싶다. 고흐가 오랫동안 후손에게 기억되기 위한 프로젝트"라고 강조했다.

이번 경매 낙찰이 불발돼도 모금액은 돌려주지 않는다. 재단 특별 전용 동결계좌에 보관했다가 고흐 작품 매입 자금으로 쓸 계획이다. 얀선스 대표는 "고흐 집안에서도 도움을 주고 있고, 오베르 시절 그림 소장자들과도 개별적으로 접촉해 프로젝트 취지를 설명하고 작품 판매를 권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2007년에도 3500만달러(약 413억원)에 달하는 고흐의 오베르 시절 밀밭 그림을 구입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당시 아메리칸익스프레스 도움을 받아 추진했으나 소장자가 금융위기로 작품을 급매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고 밝혔다. 게다가 1987년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고흐 1889년작 '정물:15송이의 해바라기가 꽂힌 화병'이 2475만파운드(약 440억원)에 낙찰된 후 작품 가격이 계속 치솟고 있다.

"고흐 그림이 재조명되면서 프랑스 당국의 세무 감사와 은행 대출 규제가 더 까다로워졌다. 내가 벨기에 출신이어서 그런 것 같다. 캠페인이 어려울 때 뉴욕타임스 등 언론사에서 기사로 도와줘서 버티고 있다. 나는 재단에서 무급으로 일하고 있으며, 고흐를 만나 더 가난한 사람이 됐다. 그나마 아내가 이해해줘서 다행이다."

이번 캠페인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기반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캠페인 참가자에게는 디지털 인증서와 고흐의 방 디지털 열쇠, 라부 여인숙 실물 열쇠 등을 제공한다. 얀선스 대표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애플 창업자인 고(故) 스티브 잡스도 라부 여인숙 열쇠를 가졌다. 나중에 그림이 고흐 방에 걸리면 디지털 열쇠를 통해 웹캠이 설치된 방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온라인 여행 예약 사이트와 호텔, 중국 기업에서 대규모 후원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거절했다. "월트 디즈니처럼 고흐를 상품화하는 전략에 이용하고 싶지 않다. 고흐 기일이면 무덤에 꽃 한 송이를 놓아달라고 수표를 보내는 사람이나 진정으로 고흐를 사랑하는 기업들과 탄탄한 마케팅 계획을 세워 같이 이끌어 가고 싶다. 고흐도 동생 테오에게 '혼자서는 성공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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