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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단독] 백경남 동국대 명예교수 “이희호 여사는 최고의 여성운동가”…자필 편지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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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1970년대 이희호 여사가 백경남 동국대 명예교수에게 보낸 자필 편지. 백경남 교수 제공


“친애하는 경남씨에게

카드 고맙습니다. 나는 갖은 어려움 속에서 오로지 주님에의 믿음이 나를 오히려 행복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경지로 이끌어줬음을 기뻐할 뿐입니다. 그런 중에 연구에 더욱 열중하는 귀한 모습을 멀리서 격려해주고 싶습니다. 나는 머지 않아 홍걸이까지 데리고 미국에 가게 될 듯 합니다. 가서 다시 소식 전하지요. 꾸준히 연구하여서 꼭 뜻을 성취하십시오.” (1970년대 이 여사가 백경남 교수에서 쓴 자필 편지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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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이희호 여사의 빈소에서 한 조문객이 큰절을 하고 있다.


지난 10일 밤 소천한 이희호 여사는 동국대 백경남(여·78) 명예교수가 대학 졸업 후 처음 인연을 맺은 ‘선배 여성운동가’였다. 두 사람은 1960년대 여성문제연구회에서 1세대 여성운동가로서 함께 일했고 지난해까지 안부를 주고 받았다.

백 교수는 12일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한국 여성사의 획기적인 발전은 선생님(이 여사) 시대에 이뤄졌다”며 “여성가족부를 신설하고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하는 등 그 분 덕분에 여성과 관련된 법과 제도가 정비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여성정책에는 선생님이 큰 영향을 미쳤다”며 “평생을 여성과 민주주의, 인권, 평화를 위해 헌신하셨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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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교수는 54년 전인 1965년 이 여사와의 첫 만남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제가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때 선생님은 여성문제연구회 회장을 맡고 계셨어요. 황신덕, 김활란 등 쟁쟁한 여성지도자들이 활동할 때였죠. 당시 여성회관은 남산타워 올라가는 길에 있었어요. 회관 옥상에서 처음 면담을 했는데 아이가 어려 자주 울 시기라 엎고 계셨어요.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이 돌 정도 됐을 때였죠.”

이 여사는 생전에 블라우스와 재킷 차림으로 활동했고 이 날도 하얀 바탕의 곤색 체크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백 교수는 “제가 여성회관 옥상에서 만난 날의 표정과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며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때와 똑같았다. 자만과 교만이 하나도 없는 분”이라고 말했다.

이 여사는 1963년 여성문제연구회 부회장으로 선출됐다가 1964년 2월부터는 회장을 맡았다. 당시 여성문제연구회가 활발하게 진행한 ‘여성의 경제적 지위향상을 위한 여성소비자 운동’과 ‘여성의 정치참여 운동’은 이 여사와 백 교수가 주도했다. 백 교수는 “여성들의 소비문화를 조사한 뒤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청회를 개최했는데 3000명이 모였다”며 “각 지역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사람들을 불러모았다”고 회고했다.

이 여사는 이후로도 여성의 정치참여 문제에 꾸준히 목소리를 냈다. 1969년 ‘한국 YWCA’ 기고글에서는 “여성들의 가정 내에서의 비능률적인 노동의 과중은 사회문제나 정치에로 관심을 돌릴 수 있는 여가를 주지 않고 있다”며 “가족중심적인 가족제가 개인의 가족에의 의존성을 조장시켜 여성의 자주성을 저해한다”고 비판했다.

여성문제연구회 시절의 인연이 평생 이어져 백 교수는 국민의정부 시절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김대중정부의 여성정책을 주도했다. 그는 “제가 추진했던 모든 정책은 선생님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인을 만나 스피치를 해야 할 때 선생님은 더욱 멋있어 보였어요. 영어를 잘 하시잖아요. 한국 여성운동가들을 제가 많이 봐왔는데 선생님은 최고의 덕성을 가지신 분이라고 생각해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바깥에서 큰 일을 하셨다면 인간의 내면에 흐르는 따뜻한 정을 나눠준 건 선생님이에요. 집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항상 국수를 삶아주며 대접하셨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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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남 동국대 명예교수


백 교수는 1969∼1971년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밟았다. 유학 시절에서도 김대중 전 대통령 부부를 자주 만났다. 김 전 대통령은 일본 내 좌익뿐만 아니라 우익 세력과 교류하며 신뢰 관계를 쌓았다. 백 교수는 “동경에 오시면 제가 두 분을 모시고 다녔다”며 “이후 일본 어른들이 한국에 올 때면 선생님이 호텔로 찾아가 백경남을 잘 부탁한다고 하셨다. 후배를 키우고 싶은 마음에 그러신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여사가 소천한 다음 날 백 교수도 빈소를 찾았다. 옛 동지들을 찾아봤지만 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 여사의 제자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노환 때문에 어렵다”는 답변을 들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거겠죠. 빈소에서도 국회의원이었던 김방림씨만 있고 선생님의 친구분과 여성운동을 함께 했던 사람들은 하나도 안 보이더라고요. 선생님이 오래 사셔서 그런 걸테죠. 매년 5월이면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는데 이제는 할 수 없게 됐네요.”

백 교수는 우리 사회가 이 여사를 지성과 지식을 겸비한 최고의 영부인이자 여성운동가로 기억하기를 바랐다. 그는 “정치 발전의 굴곡이 없었다면 진작에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라며 “제게 만큼은 모든 세대를 아우른 최고의 여성운동가”라고 말했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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