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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현장에서] 이희호 여사의 ‘화합’ 유언과 진흙탕 정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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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

“우리 국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서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1일 공개된 이희호 여사의 유언 중 첫번째 당부다. 이 여사는 가는 날까지 국민화합과 민족통일을 기원했다. 자신의 남편이자 정치적 동반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기념사업을 둘째 유언으로 미루고, ‘화합과 통일’을 첫째 유언으로 남겼다. 그러나 이 여사의 유언에도 ‘정치권의 화합’은 요원한 모습이다. 정치권은 잠시 싸움을 접고 “이 여사의 유언을 받들겠다”고 했지만, 공허한 립서비스에 그치는 모양새다.

“항상 국민 눈높이에서 생각해 심사일언(深思一言)하라”고 했던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장례가 치러지는 날 “아무거나 막말이라고 말하는 그 말이 바로 막말”이라고 했다. 사실상 막말에 면죄부를 줬다고 해석이 나왔다. 품격을 핵심 가치로 보는 정통 보수정당에서의 자정 기능을 의심케 한다. 태극기세력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제기됐다. 공교롭게 청와대 강기정 정무수석은 이날 민주당과 한국당 해산 청원과 관련해 내년 4월 총선과 결부시키는 발언을 함으로써 야당의 반발을 샀다. 청와대 수석이 앞장서 “한국당을 다음해 총선에서 심판해달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는 해석도 나오면서 정치권은 하루종일 벌집 쑤신 듯 요란하게 쌈박질을 벌였다. 그러니 이 여사가 남긴 ‘화합’ 당부를 정치권은 단 하루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장외에선 또 눈살을 찌푸리는 풍경이 나왔다. 보수색채 단체에선 문재인 대통령을 끌어내리겠다는 공언까지 나왔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인 전광훈 목사는 “문 대통령이 연말까지만 하고 스스로 청와대에서 나오라”고 주장했다. 문 대통령이 내려올 때까지 단식 기도회를 하겠다고도 했다. 이 자리에는 이재오 한국당 상임고문도 함께했다. 여기에선 지지자와 반대자들이 한때 몸싸움을 벌이는 등 난장판을 연출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대한민국의 분열과 아물지 않은 상처를 상징했다는 뒷말이 나왔다.

이 여사는 신실한 기독교 신자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찬송가를 부르면서 떠났다. 빈소에는 성경책이 펼쳐져 있었다. 한 종교단체가 연출한 이같은 대한민국의 분열상을 생전 이 여사가 봤더라면 어떤 생각을 했을지 착잡하지 않을 수 없다.

여야는 이 여사 영정사진 앞에서도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여당과 전투(?) 중인 황 대표가 장례위원회 고문을 맡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일각에서는 “장례식장에서 (5당 대표가 만나니까 국회 정상화 같은) 마법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라며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야 원내대표의 외부 회동설도 제기됐지만, 그냥 ‘설’로 그쳤다. 결국 국회 정상화 문제는 여전히 철저한 이해득실 속에 다뤄지고 있는 것이다.

국회 정상화 협상은 말 한마디를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로 난항 중이다. ‘패스트트랙을 합의로 하느냐, 합의를 원칙’으로 하느냐의 싸움이다. 서로 입장차를 상당 부분 좁혔고, 이번주 내 정상화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화합의 정신’이 아니라 서로 ‘계산’을 마쳤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라는 명분보다는 ‘당을 위해’라는 실리를내세우면서 말이다.

진흙탕 싸움의 근원적 배경은 총선이다. 총선에서 지면 끝이라는 생각을 둘 다 가지고 있으니 화합의 정치는 당초부터 제쳐둘 수 밖에 없다. 여당은 여당대로 문재인 정부를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야당은 야당대로 이번에도 지면 보수정당 존립 자체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깔렸다. 그러니 양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 정치권의 서글픈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장제원 한국당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대부분의 구민들은 ‘자유한국당 뭐하고 있냐’고 혼을 낸다”며 “‘저희들보다는 민주당을 더 혼내 주셔야지요’라고 말하면 ‘그 놈이나 이 놈이나 다 똑같아’라고 말한다”고 했다. 그는 “감히 저는 이것이 ‘민심’이라고 생각한다”며 “싸울 때 싸우더라도 할 일은 하라는 것”이라고 했다. 장 의원이 왜 이런 얘길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대다수 국민은 민주당이나 한국당이나 다 똑같다고 보고 있다. 정치권에 대한 총체적 불신이다. 신뢰를 상실한 정치권이 이 여사의 ‘유언’을 곰곰히 생각해볼때다. ‘화합의 손짓’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th5@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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