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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강원 산불 사후 관리, 조기 진화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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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산불이 발생한지 2달이 지났다. 지난 4월 4일 산불이 발생한 직후 민, 군, 관이 긴밀히 협력해 하루 만에 조기 진화함으로써 국민과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산불 진화를 전후해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이낙연 국무총리 등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피해지역을 방문해 이재민들을 위로하고 신속한 피해 복구 지원을 약속했다. 민간차원의 성금도 답지했다. 산불 원인에 대한 정부 차원의 조사 역시 발 빠르게 진행됐다.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정부의 모습에서 과거와 다른 문재인 정부의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그로부터 2달. 산불 피해 지역 주민들의 기대는 실망을 넘어 분노로 치닫고 있다. 강원 산불 피해 주민 500여명은 지난 7일 불에 탄 차를 끌고 와 청와대 인근에서 집회를 열었다. 속초·고성 산불 피해자 비상대책위원회는 "정부와 정치권은 이재민, 자영업자들이 수긍할 수 있는 지원 대책을 세워 달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정부는 특별재난 지역 선포로 긴급복구비 1천853억 원, 추경 예산 940억 원을 지원하겠다고 했는데 막상 이재민들의 주택 복구와 자영업자의 사업장 복구에는 한 푼도 쓸 수 없는 돈"이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이재민을 위해 모든 대책을 강구하고, 법을 뛰어넘는 지원 대책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했지만 모든 믿음이 무너졌다. 절망을 넘어 분노에 이르는 수준"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경찰은 온 국민이 본 '방화 불꽃'을 외면하지 말고 공명정대하게 수사하고, 한국전력 역시 피해 국민을 생각하는 자세로 보상 협상에 나서달라"고 외쳤다. 이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산불 발생 직후 정부가 전폭적인 복구지원을 약속했지만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물론 정부와 정치권은 나름의 입장과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9일 서울공항을 통해 북유럽 순방에 나서면서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에게 국회 공전으로 추경 심사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답답함을 토로했다. “정부에서 긴급하게 생각하는 추경 안이 국회에서 심사조차 되지 않고 있다”고 언급했다. 추경 예산 처리와 관련해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정부가 제출한 추경을 원안 그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한국당은 강원 산불·포항 지진 등 재난지역 지원예산을 분리해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추경 처리와 관련해 여야 각자가 정치적 계산이 있겠지만 누구의 옳고 그름을 떠나 정부의 예산 지원 조치가 지체됨으로써 가장 속 터져하는 분들은 예기치 않은 산불로 피해를 본 강원지역 주민들일 것이다. 강원 산불 피해 지역 주민들의 분노가 커지고 있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대통령과 국무총리까지 나서서 전폭적인 피해 복구를 약속함으로써 정부에 대한 기대감이 컸던데 비례해 실망감이 증폭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실망이 분노로, 나아가 정부에 대한 원망으로 발전되지 않도록 더 이상 늦기 전에 잘 제어해 나가는 것도 사후 위기관리 차원에서 정부가 반드시 해야 할 일다. 이를 위해 현 시점에서 정부 관계 당국이 재점검하고 살펴볼 일 몇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타이밍(Timing)이다. 위기관리의 핵심 중 하나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타이밍을 놓치면 의미가 없다. 당장 국회가 정상화되더라도 여야가 추경 내용에 대해 협의를 하고 심의와 의결 절차를 거치려면 빨라도 6월말은 되어야 예산 집행이 가능할 것이다. 여름철 장마와 태풍이 몰아닥치는 계절이 코앞인데 너무 늦다. 정부는 추경의 국회 통과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Plan B(첫째 안이 성공하지 못했을 경우 진행할 계획)를 본격적으로 강구할 시점이다. 이미 준비해 놓고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지체 없이 대안 마련에 착수해야할 시점이다. 고용 창출 등 경제 전반을 내다보며 숲을 그리는 큰 그림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나무를 잘 살피는 것도 중요하다. 피해 지역 주민들이 정부를 성토하는 것은 그래도 믿고 의지하고 하소연 할 곳은 정부 밖에 없다는 심정도 있을 것이다. 복잡한 여러 계산을 뛰어 넘어 피해 주민 입장에서 이들이 다시 삶의 의욕을 되찾을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지원책을 가시화하는 조치를 시급히 강구해 주기 바란다.

둘째, 강원 산불 피해 수습과 복구를 위해 대통령과 국무총리, 정부가 약속한 사항을 전반적으로 재점검하고 진행 상황을 소상히 설명해 주는 노력을 강구하기 바란다. 피해 지역 주민들이 상경해 주장하는 내용이 사실이라면 보통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산불 발생 이후 정부가 약속한 것을 모두 펼쳐놓고 지금까지 이행된 것은 무엇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어떤 것인지, 실행되지 못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를 하나씩 꼼꼼히 체크해 보기 바란다. 약속 하고 실행이 뒤따르지 않는 것은 약속을 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 정부가 빈말을 한다는 것은 정부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린다. 산불이 발생했을 때 고위 정부 관계자들이 앞 다투어 현장을 방문해 상황을 살펴본 정성의 절반만이라도 사후 관리에 신경을 써야한다. 정부 약속에 대한 진행상황을 정부 관계자가 해당 피해지역을 직접 찾아가 설명하는 노력도 긴요하다. 피해 지역 주민들이 답답해 서울로 찾아와 집회를 벌이기 이전에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먼저 찾아가 설명하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은 그간 강원 산불과 관련해 정부가 기울였던 노력에 비추어 볼 때 크게 아쉬운 일이다.

셋째, 정부는 피해 복구 대책을 집행함에 있어 합법성과 합목적성에 대한 균형 있는 고려를 해주기 바란다. 정부 행정은 기본적으로 법규에 근거해 이루어진다. 일선 공직자들은 법적인 근거가 명료할 때 움직인다. 아무리 상급기관에서 지시를 한다고 하더라도 법적 근거가 없거나 모호하다면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경우가 많다. 종종 정부가 비난 받은 이유다. 하지만 법이 현실을 앞서가거나 보조를 맞추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을 상정해 법규를 미리 제정하는 것은 있기 어렵고 문제가 발생하면 그 이후에 관련 규정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정부에서 일을 하다보면 합법성과 합목적성이라는 가치가 서로 충돌해 고민해야하는 경우가 많다. 정부가 합법성에 매몰되면 민심과 어긋나는 행정이라고 비판을 받을 공산이 크다. 반면에 합목적성만 추구하다보면 일선 공직자들이 추후 책임으로부터 자유스럽지 않아 움직이는데 주저한다. 결과적으로 그 사이에 행정의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이런 딜레마를 슬기롭게 조절하는 것이 민심을 헤아리는 정무적 감각이다. 정부도 이 점을 유념해 강원 산불이 발생했을 때 ‘법을 뛰어넘는 지원 대책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많은 간극이 있어 보인다. 일선 공직자들을 법적 책임으로부터 자유스럽게 해주면서 피해 주민들이 신속히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현실감 있는 행정력이 절실히 기대된다. 이게 실력이다.

[유재웅. 을지대학교 의료홍보디자인학과 교수. 신문방송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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