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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연간 노동시간 2745시간… 집배원 '무료노동' 언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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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세계] 집배원과 동행해보니 / 과도한 업무강도… 과로사로 이어져 / 배송 물량 많은 지역은 격무 시달려 / 시간에 쫓겨 점심도 못 먹어 / 초과근무 1시간30분까지만 인정 / "인력증원 절실" vs "적자상황에선 어려워"

세계일보

올해 첫 서울 폭염주의보가 내린 지난 24일 오전 9시. 우편물을 가득 실은 서울 집배원 A(41)씨의 오토바이가 우체국을 나섰다. 집배원 11년차 A씨는 자신이 맡은 모든 구역의 정보를 꿰고 있었다. 어떤 길로 배송하면 빠른지, 어떤 집이 이사를 왔고 이사를 갔는지, 부재중인 때가 많은 집인지, 우편물을 잘 받는 집인지. 그는 우편 배송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동네 전문가’가 된다고 웃음 지었다.

◆ 집배원 A씨 배송현장 동행해보니

세계일보는 과로사한 집배원 고(故) 이은장씨 이후 과한 업무강도를 호소하는 집배원들의 목소리를 듣기위해 이날 A씨의 우편 배송현장을 동행했다. “우체국에서 나왔습니다.” 우편물을 제시간에 전달하기위해 A씨는 쏜살같이 아파트를 돌았다. 그가 아파트 3개동을 도는데 걸리는 시간은 15분에 불과했다. 그는 “모든 아파트 출입 비밀번호까지 외우고 있다”며 “우편 수신함이 아파트 안에 위치한 경우가 있고, 경비원을 부르거나 수신자를 호출하면 배송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11년간 같은 곳을 돈 A씨는 이른바 ‘인간 네비게이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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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가장 힘든 배송 코스는 낙후된 상가와 빌라가 밀집된 지역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하루 종일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 때문에 A씨를 비롯한 주위 집배원들은 대부분 허리와 다리통증을 호소하고 있다고 했다. 전체 우편 수신함에 넣는 일반 우편물과 달리 택배와 등기우편은 직접 대면전달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전달 시간이 오래 걸렸다. 열심히 계단을 올랐는데 등기우편 수신자가 부재중이면 허망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 경우 문 앞에 ‘우편물 도착 안내서’를 붙이고 다시 방문하겠다는 통보를 남겼다.

A씨는 배송보다 더 힘든 것이 ‘사람’이라고 했다. 한번은 등기배송을 위해 문을 두드리자 한 40대 남성이 “밑에 두고 가지 왜 가지고 올라와요?”라며 짜증스런 반응을 보였다. 그렇지만 등기우편은 대면배송이 원칙이어서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다. A씨는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는 어르신들과 달리 40~50대들은 대면배송에 불편해하는 경우가 많다”고 귀띔했다. 배송 중 A씨의 업무용 PDA(개인 정보 단말기)는 끊임없이 울려댔다. “그 시간에 저 없는데 다른 때 오면 안돼요?”, “등기 찾으러 제가 직접 우체국까지 찾아가야 해요?” PDA 너머로 사람들의 불만들이 들려왔다. A씨는 “고객에게 욕설을 들은 적도 여러번”이라고 했다.

◆ “물량 너무 많아…점심도 못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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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가 이날 전달한 일반 우편물은 1200여개, 등기택배는 150여개정도다. 이는 평소보다 적은 수준이라고 했다. 일반 우편물보다 배송이 까다로운 택배배송도 인터넷쇼핑의 발달로 점차 증가하고 있다. 부피가 큰 택배의 경우 위탁업체가 배송하고 비교적 작은 택배가 집배원의 몫으로 주어지지만 택배가 오토바이 수납공간을 가득채울 정도로 양이 적지 않았다.

2017년 기준 집배원의 일 평균 배달물량은 일반우편 823개, 등기택배 136개가량으로 조사됐다. A씨는 “배송 물량이 많은 구역과 적은 구역의 수치를 합한 평균 값이다”며 “집배원 배송구역은 안 바뀌기 때문에 일단 물량 많은 지역에 걸리면 계속 격무가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했다. 우정사업본부, 노조, 전문가로 구성된 ‘집배원노동조건개선기획추진단(추진단)’이 2017년 집배원 실태조사를 한 결과 집배원 71.6%가 “현재 배송물량이 적절하지 않다”고 답했다.

충남 공주우체국 소속이었던 고 이은장씨도 상대적으로 배송거리가 긴 시골에서 하루 1200여개의 우편물을 배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A씨는 우편물을 제때 전달하다보면 점심을 오후 4시쯤에야 먹는다고 했다. 특히 우편물이 몰리는 선거철이나 명절에는 늦은 점심조차 먹을 수 없다고 한다. 입사 후 A씨는 몸무게가 26kg이나 빠졌다. 우체국이 요구한 업무를 제시간에 수행하려면 A씨는 배송시간을 최대한 줄여야 했다. 집배원들이 빠른 배송방법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조급하게 초인종을 누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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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무료노동’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집배원들

집배원의 업무는 크게 등기택배 분류, 배송, 일반우편 분류로 나뉜다. 지역 우체국마다 다르지만 A씨가 속한 우체국의 경우 아침에 등기, 택배를 실은 수송차가 오기 때문에 출근하자마자 집배원들이 집배실에 모여 자기 구역의 등기소포와 택배물량을 분류한다. 분류가 끝나면 구역 내 정해진 코스로 배송을 떠난다. A씨는 구역을 12개 코스로 나눠 우편을 배송했다. 이후 5시부터는 기계에 의해 분류된 일반우편물을 다음날 배송할 수 있도록 구역 코스에 맡게 분류하는 직업을 한다.

추진단 조사결과 ‘우편물 배달 업무’의 경우 6시간30분, ‘등기택배 및 우편 분류작업’은 각각 2시간 내외의 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모두 10시간30분이 걸리는 셈인데 집배원들은 우정사업본부가 초과근무를 인정하지 않아 ‘무료노동’이 반복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A씨도 우체국이 오전8시부터 오후5시까지 근무시간만 인정하고 초과근무는 오후6시30분까지 만을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1시간30분까지 인정되는 초과근무도 물량이 적은 날은 집배실장이 게시판에 “오늘은 시간 외 근무 없습니다”라고 적어 근무를 인정하지 않는 날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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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대선 후보 시절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 용산우체국에서 집배원 체험을 하고 있다.


민주노총 소속 ‘전국집배노조’는 지난 22일 “(고 이은장씨 사망사고가 발생한) 공주우체국은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인 4월까지 정규직 집배원의 실제 출퇴근 시간을 임의조정하고 있었다”며 “경인지방의 한 우체국의 경우 2018년 말까지 비정규직 집배원의 초과근무를 인정하지 않고 무료노동을 방관해온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노조 측은 이와 관련 고용노동부에 우정사업본부에 대한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집배원의 근무는 토요일도 이어졌다. A씨가 속한 8명의 팀은 4명씩 조를 나눠 격주로 토요근무를 하고 있었다. 토요근무는 통상 8시부터 1시30분까지인데 2명 구역을 1명이 맡기 때문에 업무강도가 높다고 했다. 대신 일반우편, 등기배송은 하지 않고 택배만 배송한다.

집배원 토요근무는 2014년 7월 집배원 근로복지 증진을 위해 폐지됐다가 이후 2015년 9월 다시 재개했다. 우정사업본부 관계자는 “국민생활불편이 가중돼 토요근무를 재개했다”며 “민간 택배는 토요일 근무를 하는데 우체국만 토요일 근무를 폐지하는 것에 대해 이른 감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집배원 인력증원 절실”vs“우체국 적자상황에선 어려워”

이같이 집배원 업무강도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고 있지만 인력충원계획은 요원한 상황이다. 추진단의 2017년 조사에 따르면 집배원의 평균 노동시간은 연 2745시간으로 임금노동자 연간 평균노동시간(2052시간)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추진단은 주52시간(연간 2340시간) 근무를 위해선 2858명의 집배원 증원이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우정사업본부는 지난해 국회에 ‘1000명의 인력증원’을 요청했지만 관련 예산이 삭감돼 올해 집배원 증원은 사실상 좌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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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업무강도는 집배원들의 과로사로 이어지고 있다. 우정사업본부에 따르면 심근경색, 혈관질환, 뇌출혈 등 과로에 의한 사망으로 추정하는 집배원은 올해 5명에 달했다. 지난해에도 집배원 7명이 심혈관 질환으로 숨졌다.

최승묵 전국집배노동조합 위원장은 “지난해 사회적합의기구에서 집배원 2000명 증원을 약속했는데 결국 지키지 않았다”며 “2000명 증원도 최소근로 기준인데 이조차 투입되지 않는다면 과로사 위험은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우정사업본부 관계자는 “우편물량이 줄고 인건비가 상승해 올해 1960억 적자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집배원 증원이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난감해 한 뒤 “배송 프로세스 개선, 안전사고 예방, 보건관리 강화 등 집배원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했다. 다른 관계자도 “일부 우체국의 경우 특정 집배원에게 물량이 몰리기도 하는데 이런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 전체적인 인력재배치 등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승진 기자 prod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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