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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 없다면 누가 우리 말을 믿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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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수사기관의 수사 결과, 언론의 특종 제공해온 ‘5·18 기록자’ 정수만 전 5·18 유족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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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면 5·18민주화운동(이하 5·18) 40주년이다. 39년간 크게 세 차례의 진상 규명 기회가 있었다. 1988~89년 국회 광주 청문회, 1996~97년 전두환·노태우 등 내란죄 재판, 그리고 2005년 출범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이다. 현대사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으레 ‘5·18민주화운동 진상 규명은 일단락됐다’고 여기는 이유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국회 광주 청문회 때부터 본격화된 신군부 세력의 조직적 왜곡·은폐, 그리고 ‘화해’를 명분으로 한 정치적 타협이 번번이 진상 규명을 가로막았다. 집단 발포 경위, 최초 발포 명령자, 헬기 기관총 사격, 실종자 암매장 등 핵심 쟁점에 대한 진실 공방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자신감을 회복한 신군부와 극우 세력은 진상 규명의 허점을 파고들어 복권을 시도하고 있다. 전두환은 2016년 5월 발행된 <신동아> 인터뷰에서 자신이 발포 명령자로 지목되는 것에 대해 전면 부인하며 포문을 열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 그때 어느 누가 국민에게 총을 쏘라고 하겠어. 광주 사태 때 내가 보안사령관이었을걸? 보안사령관은 정보 수사 책임자요. 어떤 정치인, 어떤 대통령이 되려다 못 된 사람이 그런 모략을 그쪽(5·18 책임 전가)으로 풀었는지 몰라도, 내가 광주 사태를 일으킨 걸로, 주동한 걸로 나쁜 소리를 하는데 내가 이후 대통령이 됐으니 그러는 거지”라고 전면 부인했다. 인터뷰 이후 전두환 회고록이 출간됐고, 고 조비오 신부 사자명예훼손 재판으로 번진 회고록 논란은 ‘계엄군의 헬기 사격’ 등 논란을 촉발하며 또 다른 진상 규명의 장을 열었다.

최근 자유한국당의 위원 추천 문제로 출범이 지연되는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5·18 책임자들의 위험한 복권 시도, 이어진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5·18 망언 등에 쐐기를 박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지난해 ‘계엄군에 의한 집단 성폭행’ 등 광주에서 5·18의 진실을 추적 보도해온 <한겨레> 정대하 기자는 “진상 규명은 ‘주댕이’가 아니라 ‘팩트’로 하는 거여”라며 5·18 관련 ‘팩트’를 가장 많이 보유한 인물로 정수만(72) 전 5·18 유족회장을 꼽았다. 정 전 회장은 말했다. “공식적으로 세 번이나 조사하고도 진상 규명을 못했어요. 아마 이번이 마지막일 거예요. 다시 5·18을 조사하자고 하면 욕먹어요.” 정 전 회장처럼 진상 규명의 그날을 별러온 이들이 벼려온 기록은 5·18에 대한 역사적·법적 판단을 마무리지을 ‘창’이 될 것이다.


5·18민주화운동(이하 5·18)에서 가장 큰 쟁점 중 하나인 ‘광주교도소 습격 사건’이 있다. 신군부 쪽에선 시민들이 광주교도소를 습격했기 때문에 계엄군이 방어했다는 논리를 폈다. 1997년 전두환 등의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죄 대법원 판결에서 신군부의 거의 모든 주장이 배척됐지만, 이 주장만큼은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만일 광주교도소 습격 사건이 사실이라면 아무리 민주화운동을 했어도 광주 시민이 국민들한테 용서받기 힘든 일”이라며 조목조목 ‘광주교도소 습격 사건 조작’의 근거를 대는 민간 연구자가 있다. 정수만(72) 전 5·18 유족회장이다.

21일 총을 맞은 류영선이 23일 사건의 주동자로



정 전 회장은 5월20일 광주 동구 운림동의 한 카페와 자택에서 진행된 <한겨레21> 인터뷰에서 말했다. “광주교도소 습격 사건에서 유영선이라고도 하고 류영선(당시 27살)이라고도 하는 인물이 중요해요. 류영선이 형 류낙진(당시 52살·비전향 장기수)을 광주교도소에서 빼내려고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거예요. 군부는 (5월21~23일 습격 사건 중) 5월23일 류영선이 광주교도소를 습격했다고 조작했어요. 류영선의 친척은 5월26일 살아 있는 류영선을 봤다고 증언했어요. 류영선이 5월27일 사망했다는 군 발표를 뒷받침하는 증언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런데 류영선은 5월21일 전남도청 집단 발포 때 총을 맞았어요. 기독교병원 기록을 보면 세미 코마상태(의식불명)라는 말이 나와요. 두부 관통상이라고도 나오지요. 제가 찾아낸 투약 기록을 보면 23일까지밖에 없어요(23일 사망 가능성). 21일 두부 관통상으로 혼수상태였던 사람이 23일에 교도소를 습격할 수는 없잖아요. 만일 우리한테 ‘기록’이 없었다면 누가 우리 말을 믿겠어요, 군 발표와 친척 말을 믿지. 정확한 기록이 없으면 우리가 이길 수 없어요.”

1997년 대법원 판결은 지금까지도 신군부와 극우 세력이 5·18을 왜곡하는 주요 근거가 되고 있다. 정 전 회장 등의 노력으로 국방부의 2007년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진상조사보고서와 최근 5·18특별조사위원회 최종 보고서 등엔 ‘광주교도소 습격 사건’은 조작됐다는 사실이 담겼지만, 1997년 당시 대법원은 이를 몰랐다.

광주교도소 습격 사건뿐만이 아니다. 이제까지 수사기관이 ‘수사 결과’로, 언론이 ‘특종’이라는 이름으로 드러낸 수많은 5·18 관련 진실의 ‘이름 없는 배후’가 정 전 회장이었다. 그는 “우리가 역사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기록이지 말(주장)이 아니다. 우리는 기록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록을 모았다고 했다.

그는 1980년 5월21일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때 남동생 지영(당시 31살)씨를 잃었다. 이듬해엔 동생의 추모제를 지내다가 구속돼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살기도 했다. 그렇다고 “단지 유족이기 때문에 30년 넘게 ‘기록’에 몰두한 건 아니”라고 했다. 평범한 광주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나 많은 것을 봤는데 너무 많은 것이 왜곡”되고 있었고 “언젠가는 밝혀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록자’의 역할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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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일지를 ‘아래아한글’로 쳐서 정리



정 전 회장은 1986년 무렵부터 관련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신군부와 싸운 사람들이 누구인지, 어떻게 싸웠는지를 알아야 5·18의 진실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만 해도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은 당사자들을 만나는 것뿐이었다. 1988년 국회 광주 청문회가 시작되면서 ‘공식 기록’이 나왔다. “훗날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기록뿐”이기 때문에 누군가 그 기록을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차고 넘쳤지만 손대면 위험했기 때문에” 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나라도 하자’ 싶어 시작한 일이 오늘에 이르렀다.

정 전 회장은 1988~89년 국회 광주 청문회(이하 1기), 1996~97년 전두환·노태우 등 내란죄 재판(이하 2기), 그리고 2005년 출범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이하 3기)의 공식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는 “광주에서 1~3기 기록을 다 가지고 있고 다 본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자부한다.

1~3기 자료 외에도 5·18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고 하면, 국회든 육군본부든 검찰과 경찰이든 가리지 않고 쫓아다녔다. 기록을 안 내놓을 땐 정보공개 청구소송도 불사했다. 사재를 털어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로스앤젤레스캠퍼스(UCLA) 도서관이든 독일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든 어디든 누구든 찾아가 자료를 받아왔다. 자료 보관과 검색을 위해 1300만원짜리 파나소닉 스캐너를 사서 종이 자료를 일일이 스캔했다. 그가 파일 형태로 가진 개인 소장 기록이 수십만 장, 인물·날짜·쟁점별로 정리해놓은 목록만 7만5천여 개에 이른다. 정 전 회장이 보안을 걸어놓은 컴퓨터 프로그램에 5·18 관련 검색어를 입력하면 관련 자료가 일목요연하게 뜬다. 그는 “앞으로 나올 자료는 몰라도 지금까지 나온 자료는 앉은자리에서 바로 다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처음엔 ‘니들이 아무리 숨기고 왜곡하고 조작한들 어딘가엔 빈틈이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군 일지를 ‘아래아한글’로 쳐서 정리했다. 한국에 컴퓨터가 막 보급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하드디스크도 없이 5.25인치 플로피드라이브가 두 개 달린 286XT 컴퓨터, 운영체제 도스, 아래아한글 버전 1.50 프로그램으로…. ‘돌도끼’ 컴퓨터로 한 글자 한 글자 쳐가며 기록하기 시작했다. 국내에 노트북이 나오기도 전 대만제 ‘볼텍’을 사서 개인 인터뷰 내용과 일지도 기록했다. 당시엔 상당한 고가인 330만원짜리 삼성 노트북을 산 뒤 개인 저장 프로그램을 따로 사서 기록을 옮기기도 했다. 그가 자료를 보관하는 노트북만 총 9대에 이른다.

정 전 회장이 정리한 기록은 전두환을 법정에 세우는 데도 주요하게 쓰였다. 정 전 회장은 당시 ‘5·18 학살자 재판 회부를 위한 광주·전남 공동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그가 소장한 자료를 토대로 고발장을 만들었다. 검찰도 자료를 수사에 활용했는데, 다만 자료 제공자가 누구인지 밝힐 수는 없었다. “자료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나만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기록을 일일이 검토해가며 기록한 일지는 ‘시민군 선제무장설’을 신군부가 조작했다는 걸 밝히는 데도 핵심 역할을 했다. 2017년 9월 전남경찰청은 ‘5·18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시민의 무기고 탈취보다 군의 집단 발포가 먼저였다고 인정했다. ‘전남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 상황’ 기록 등을 보면, 계엄군의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가 5월21일 낮 12시59분께 시작된 반면 시민의 무기 탈취는 31분 뒤인 오후 1시30분 나주 남평지서에서 최초로 이뤄졌다. 군은 그동안 시민들이 21일 오전 8시 나주 반남, 오전 9시 나주 남평지서에서 무기를 탈취했기 때문에 자위권을 발동했다고 주장해왔다.

극우인사 망언 유죄판결에도 큰 영향



5·18 왜곡을 주도하는 극우 인사 지만원씨가 2002년 말 피소당한 뒤 구속돼 2003년 유죄판결을 받을 때도 정 전 회장의 기록과 증언이 큰 영향을 미쳤다. 지씨는 ‘계엄군이 대검으로 시민의 가슴을 찔렀다’는 얘기가 유언비어라고 주장했다. 정 전 회장은 재판에서 “손옥례라는 아가씨가 좌측 유방 자창으로 사망했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고 증언했다. 지씨는 시민 사망자 중 최대 88명이 시민군이 무기고에서 탈취한 칼빈 소총에 의한 사망자라고도 주장했다. 계엄군 총(M16)에 맞아 숨진 게 아니라 시민군끼리 싸우다 숨졌다는 주장이다. 정 전 회장은 재판에서 “21일 숨진 4명 중 칼빈 사망자가 있는데, 당시 시민군 중에는 칼빈을 든 사람이 없었다. 군 기록상으로도 칼빈 사망자는 28명에 불과하다. 부패된 시체를 검안으로 칼빈과 M16으로 구분할 수도 없다”고 지적했다. 지씨는 당시 광주에서 간첩이 활동했다고 주장했다. 정 전 회장은 “배후 조종 간첩으로 지목된 이창용은 ‘5·18 이후’ 남한으로 내려왔으며, 나중에 홍종수라는 사람으로 바뀌어 서울에서 잡혔는데 광주에는 들어오지도 못했다. 1982년 기소유예로 끝난 사건인데, 간첩이라면 어떻게 기소유예로 끝났겠느냐”며 간첩으로 몰린 사람들이 간첩이 아니었다는 증거를 들이밀었다.

혹자는 진실 규명을 위해 정 전 회장이 평생 모은 기록을 “공유하자”고 쉽게 말한다. 그는 “진실 규명을 위해서라면 서슴지 않고 내줄 생각”이고 이미 일부는 5·18기념재단에 넘겼다. 그러나 아직은 “기록을 다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정 전 회장은 누구보다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반대로 “막 갖다가 주워가지고 쓰면 안 되는” 기록의 위험성도 잘 알기 때문이다.

정 전 회장은 “5·18 관련 공식 기록을 직접 봤더라도, 1기-2기-3기를 따로 보는 건 소용없고 오히려 더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국회 광주 청문회 때부터 본격화된 신군부 세력의 조작·왜곡·은폐로 1~3기 기록이 각각 다르다. 그중 어느 하나만 보고 “기록을 봤다”고 생각하면 조작된 자료에 속을 수 있다. 실제로 기록 하나만 확인하고 보도된 ‘오보’도 많다. 1~3기 기록을 다 보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바뀌었는지 서로 크로스체크(대조검토)해봐야 진실의 일단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위원회 출범하면 가장 먼저 확보할 자료



5·18의 진실과 거짓을 가릴 ‘디테일’을 가장 많이 쥐고 있는 정 전 회장이지만 아직 찾아야 할 기록이 더 남았다고 했다. 자유한국당의 위원 추천 문제로 지연되는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출범되면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할 자료다. 그는 3권으로 정리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50쪽밖에 공개되지 않은 31사단 작전상황일지, 10장밖에 공개되지 않은 항공대 상황일지를 최우선으로 꼽았다. 전두환이 광주에 왔네 말았네 논란도 필요 없이 “군이 움직인 기록만 확인하면 진실은 바로 규명”되리라는 확신이다.

광주=글·사진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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