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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디테일] 쌍둥이의 기적같은 '전교 1등'…숙명여고 교무부장 유죄 근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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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열린 '숙명여고 시험지 유출사건 1심 선고 관련 기자회견'에서 공정사회를 위한 국민모임 회원들이 학생부종합전형(학종)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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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교육현장에 대한 신뢰가 바닥에 떨어졌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4단독 이기홍 판사)

서울 강남의 명문 사립고인 숙명여고에서 일어난 시험문제 유출 사건은 우리 사회 고교 시험과 공교육에 대한 신뢰를 뿌리째 흔들었다. 주범으로 지목된 전 교무부장 현모(52)씨의 혐의는 ‘모두 유죄'라는 게 1심의 결론이다. 현씨가 시험문제를 유출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각종 정황증거를 통해 유죄 판결을 내릴만한 충분한 ‘심증’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현씨의 1심 선고는 지난 23일 있었다.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24단독 이기홍 판사는 그에게 징역 3년6개월을 선고했다. 특히 선고공판 당일 판결 이유만 57분 동안 설명했다.

이 판사는 "현씨의 범행으로 사회적 관심과 투명성·공정성 요구가 높은 고등학교 정기고사 성적 처리 절차가 숙명여고뿐 아니라 다른 학교들까지 의심의 눈길을 피하지 못하게 됐다"며 "국민의 교육현장에 대한 신뢰가 바닥에 떨어지고 성실한 다른 교사들의 사기까지 떨어져 중형의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했다.

다음은 재판부가 현씨를 유죄로 판단한 핵심 근거들이다.

①시험지는 현씨 손에 있었다
현씨는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시험지를 봤을 것이라고 봤다. 첫째 현씨의 지위다. 교무부장인 현씨는 정기고사 시험의 결재권자였다. 시험 출제 원안과 서술형 답안 작성지, 정답이 적혀 있는 표 등 출제서류는 교무부장인 현씨와 교감의 결재를 받도록 돼 있었다.

법정에 나온 숙명여고 교사들은 많게는 5~6과목의 결재가 한 번에 올라갔다고 증언했다. 대면결재는 잠깐동안 이뤄졌지만, 결재를 올린 교사가 수업을 들어가면 수업 시간 50분 동안 현씨가 출제서류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이런 경우가 매 시험마다 2~3차례 있었다. 현씨가 이때 시험지를 세세하게 넘겨보고 있다고 해도 다른 교사들이 의심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이 판사의 판단이다.

둘째 시험지를 보관하는 금고가 그의 손에 있었다. 숙명여고는 시험에 앞서 교무실에 있는 금고에 시험지를 보관했는데, 이 금고는 현씨 자리 바로 뒤에 있었다. 숙명여고 학업성적관리시스템상 시험의 보안 유지 책임자는 현씨였다. 금고를 관리하는 이는 따로 있었지만, 교무부장도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 현씨의 전임 교무부장도 현씨에게 비밀번호를 인수인계했다고 했다. 교무실에 다른 사람만 없다면 현씨는 몇 발짝 움직이지 않고도 언제든 금고를 열어 출제서류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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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쌍둥이 딸에게 시험문제·정답을 유출한 혐의로 구속기소 된 서울 숙명여고 전 교무부장 현모씨(앞쪽)가 지난달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속행공판에 출석하며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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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시험 직전마다 수상한 ‘주말 출근'
현씨는 내신 시험 직전마다 야근이나 주말 출근 등 초과근무를 했다. 아무도 없는 교무실에 혼자 나온 것이다. 시험을 4~5일 앞둔 2017년 12월 첫 주말도 그랬다. 전 과목 시험지가 모두 모아져 있을 가능성이 높은 시기였다. 이 판사는 현씨가 이때 금고 문을 열고 답안지를 확인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이듬해 쌍둥이 딸들의 2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앞두고 현씨는 초과근무를 했는데도 초과근무장부에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이때도 시험 5일 전이었다. 게다가 현씨의 업무용 컴퓨터에서도 초과근무를 한 업무 기록이 전혀 없었다. 당시 숙명여고 폐쇄회로(CC)TV에는 교무실 주위를 살피는 현씨의 모습이 찍혔다. 이 판사는 주위를 살피는 현씨의 모습도 금고를 열기 전 주변 정황을 파악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③쌍둥이 딸의 ‘기적같은’ 성적 상승
중상위권이던 쌍둥이 딸은 불과 두 학기만에 최상위권 성적이 됐다. 드라마틱한 성적 상승이다. 큰딸의 경우 문과 전체에서 121등 5등 1등으로 수직 상승했고, 작은딸도 이과 전체에서 59등 2등 1등으로 올랐다. 2학년 1학기에는 쌍둥이 딸들이 각각 문·이과에서 전교 1등을 차지했다. 검찰은 이를 두고 "기적같은 일"이라고 했다.

특히 큰딸은 평소 유난히 수학 과목이 부진했는데, 전교 1등을 했을 당시 미적분I 과목 중간·기말고사에서 모두 100점을 받았다. 중학교 2~3학년 때 큰딸의 수학 수준은 C~D(60~70점) 등급에 불과했다. 또 내신 성적은 급상승했지만 당시 다니던 사설 수학학원 레벨테스트의 등급은 크게 오르지 않았다. 모의고사 점수와 내신 성적 차이가 지나치게 많이 나는 점도 의심할 만한 대목이었다.

이 판사는 쌍둥이 딸이 5지 선다형 문제에 비해 유출이 까다로운 서술형 문제를 유독 많이 틀린 점을 주목했다. 쌍둥이 딸은 서술형 비중이 높은 국어나 영어 영역의 서술형에서 오답을 적거나 아예 풀이 시도조차 하지 않고 비워두기도 했다. 아버지 현씨가 미처 유출을 못 했거나, 쌍둥이가 긴 서술형 답안을 완벽하게 외우지 못해 틀렸다는 게 이 판사의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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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중 동생인 작은딸이 ‘운동과 건강생활' 시험지에 미리 암기한 것으로 보이는 정답을 작게 적어놨다(빨간 원 안). /수서경찰서 제공

④"풀이과정 없이 암산 만점? 천재 아냐"
쌍둥이 딸의 행적도 의심스러웠다. 현씨의 범행에 두 딸이 공모한 것으로 인정된 이유이기도 하다. 시험지에 엄지손가락 만한 넓이로 ‘깨알 답안'을 적어놓거나 만점을 받고도 풀이 과정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이 판사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정"이라고 했다.

작은딸은 지난해 2학년 1학기 기말고사 물리I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다. 그런데 쉬운 문제의 경우 풀이과정이 적혀 있지만 유독 어려운 문제에서 풀이과정이 전혀 없었다. 이에 대해 출제 교사는 "고난도 문제를 암산으로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 판사는 "생각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은 작은 딸이 천재일 경우"라면서 "(유출 전) 2017년 1학년 1학기 성적을 봐도 작은 딸은 평범한 학생일 뿐이며 선천적 천재는 아니다. 1년 만에 천재적인 실력을 가지게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했다.

쌍둥이가 같은 문제에서 출제자가 잘못 낸 ‘정정 전 정답'을 여러 차례 똑같이 고른 것도 핵심 증거가 됐다. 심지어 문제를 풀 때에는 정정 이후 정답을 골라 시험지에 표기하고도, OMR 카드(답안지)에는 정정 이전 정답을 마킹한 경우도 있었다. 이 판사는 "출제서류에 적혀 있었던 정정 전 정답만 알고 있어 발생한 일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며 "정말 정답을 전혀 모른 채 문제를 풀었다면 ‘깨알 정답'을 적어 둘 이유가 하나도 없고, 정정 전 정답을 무비판적으로 선택할 이유도 없다"고 했다.

[백윤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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