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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장보기 약자’ 노인에게 쇼핑하는 재미를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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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조기원의 100세 시대 일본

⑥ ‘쇼핑 재활’ 사업

인구감소로 주거지 근처 상가 없어져

멀리 못 가는 고령자 ‘장보기 약자’로

과거에는 식료품 배달해주는 서비스

지금은 직접 장을 보게 유도하는 쪽

유산소운동 되고 나들이 기분 느껴

“장보기가 치매 위험 줄인다” 연구도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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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닥에 힘을 주어보세요. 걷는 데 필요한 근육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지난 15일 오전 10시30분께 일본 아이치현 나가쿠테시에 있는 쇼핑센터 ‘아피타 나가쿠테점.’ 2층 전자제품 상가 앞 통로에서 고령자 6명이 강사의 지도에 맞추어서 체조하고 있었다. 발바닥에 천을 대고 들어 올리고 어깨를 돌렸다. 체조하기에 앞서 혈압을 재 기본적 건강상태도 점검했다.

이날은 나가쿠테시가 고령자 건강을 돌보기 위해서 하는 ‘쇼핑 재활’ 사업이 열린 날이다. 나가쿠테시는 지난해 7월부터 매주 수요일 오전에 평소 장을 보기가 어려운 노인들을 대상으로 쇼핑센터에 데려다주고 다시 집에 바래다주는 ‘쇼핑 재활’ 사업을 하고 있다. 참가비는 1회당 300엔(약 3000원)이다. 고령자들은 체조가 끝나자마자, 본래 목적인 장을 보기 위해서 지하 1층 식료품 판매대로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참가자는 30여분 정도 다 함께 체조하고 이후 각자 장을 보게 되어 있다. 나가쿠테시의 장수과 지역지원계장인 이나가키 미치오는 “시에서 고령자 대상 운동 교실을 열고 있지만 참가하지 않는 분이 많다. 쇼핑과 운동을 결합하면 참여율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사업 취지를 말했다. 체조는 고령자 돌봄 관련 사업을 하는 회사인 ‘싱크 바디 재팬(Think Body Japan)이 담당한다. 이 회사 경영기획실 실장인 가마오 카즈무사는 “장보기 자체가 유산소운동이 되기 때문에 체조는 근력 트레이닝과 스트레칭 위주로 실시한다”고 말했다.

올해 98살 여성인 아오키는 두 달 전부터 나구테시가 실시하는 ‘쇼핑 재활’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젊었을 때부터 독신으로 지낸 아오키는 쇼핑 재활 사업에 참여하기 전에는 제대로 된 장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조카가 있기는 하지만 매번 쇼핑센터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기는 미안하다. 평소 알고 지내는 택시 기사에게 부탁해서 쇼핑센터에 가고는 했는데, 시청에서 이런 행사를 한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더는 부탁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아오키는 평소 점심은 300엔대 배달 도시락으로 해결한다. 나가쿠테시는 65살 이상이면서 혼자 사는 사람 또는 부부 모두가 75살 이상인 경우에는 집에 도시락을 배달해준다. 아오키는 “오늘은 도시락이 아니라 장을 봐서 점심을 해결할 생각”이라며 웃었다.

올해 80살 여성인 야마다 나오코는 ‘쇼핑 재활’ 사업 단골 참여자다. 지난해 가을부터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 혼자 사는 그는 “집 근처에는 차도가 많아서 밖에 나가서 장을 보는 게 위험하다. 아들이 있지만 멀리 살기 때문에 장 보러 같이 가자고 부탁하기 쉽지 않다”고 했다. 쇼핑 재활 사업은 나가쿠테시뿐만 아니라 야마가타현 덴도시, 시마네현 운난시 등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하고 있다.

“장을 볼 때는 신기하게 안 아파”

일본에서는 2008년 <장보기 난민-또 하나의 고령자 문제>라는 책 출판을 계기로 ‘장보기 난민’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인구감소로 주거지 근처 상업시설이 문을 닫는 현상이 속출하자 나온 말이다. 장을 보러 멀리 갈 수 없는 고령자는 주거지 근처에 상업시설이 없어지면 장보기 난민이 되기 쉽다. 대도시에서도 인구감소 탓에 채산성이 악화하면서 버스 노선이 줄어드는 현상은 고령자가 장을 보기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일본 정부는 장보기 난민 보다는 순화된 표현인 ‘장보기 약자’라는 말을 사용한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2014년 60살 이상 장보기 약자가 일본 전역에 약 700만명이 있다고 추정했다. 경제산업성은 장보기 약자가 시골뿐만 아니라 수도인 도쿄 곳곳에도 있을 만큼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장보기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본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주로 취했던 정책은 고령자에 집이나 근처에 식료품을 가져다주는 서비스였다. 도시락을 직접 집으로 배달해주는 서비스나 식료품을 실은 판매 차량이 상업시설이 적은 지역에 찾아가는 ‘이동 판매’ 서비스가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고령자가 직접 장을 보게 유도하고 이를 건강 유지에까지 연결하자는 시도가 확산되고 있다. 쇼핑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과 활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가쿠테시 쇼핑 재활 사업에 참여한 고령자들 대부분이 평소 장을 아예 못 보는 상황은 아니다. 집 근처에 편의점 정도는 있어서 간단한 장은 볼 수 있지만, 비교적 넓은 쇼핑센터에서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구경하는 재미를 찾고 싶어하는 이들이 더 많다.

나카지마 노리코(78·여)는 필요한 식료품은 사실 집 근처에서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집 근처 편의점에서 식료품은 살 수 있다. 공원도 있어서 산책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들이하는 기분을 맛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니와 사치에(88·여)는 “허리가 아파서 걷기가 힘들다. 그런데 장을 볼 때는 신기하게도 아프지 않다”고 말했다. “카트에 몸을 실으면 걷기도 편하다. 혼자 장을 보면 뒤처리도 힘들다. 무거워서 장 본 물건을 들고 오기 힘든 데 이곳에 오면 사람들이 도와주니 한결 수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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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전용 카트도 등장

고령자가 마트에서 장을 보기 편하도록 개발된 전용 카트도 등장했다. 시마네현 운난시에 있는 벤처기업 ‘히카리 프로젝트’ 대표 스기무라 타쿠야는 원래 고령자 관련 시설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려서 고령자 전용 카트인 ‘라쿠라쿠 카트’를 개발했다. 지난 20일 <한겨레>와 전화 인터뷰에서 스기무라는 “재활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힘들다는 생각부터 한다. 즐겁게 재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다. 쇼핑센터 안에서 걸어 다니는 것 자체가 재활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고 말했다. 라쿠라쿠 카트는 일본 고령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보행 보조기와 비슷하게 생겼다. 상단부에 손을 얹어 기댈 수 있는 받침대를 만들었고, 전체 높이는 조절 가능하다. 스기무라는 “체중을 카트에 싣기 쉬워서 걷기 편한 구조”라고 설명했다. 무채색에 직선 구조로 된 보행 보조기와 달리 녹색 칠을 했으며 곡선 형태를 더했다. 스기무라는 “세련되게 보이기 위해서 디자인에 신경을 썼다”고 말했다.

고령자 건강과 장보기의 연관 관계는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연구 결과는 조금씩 나오고 있다. 지난달 도쿄의과대와 지바대 연구팀은 집 근처에 식료품을 살만한 가게가 많이 있는 고령자가 전혀 없는 경우와 비교했을 때 인지증(치매)에 걸릴 확률이 1.65배 낮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65살 이상 고령자 4만9000여명을 2010년부터 2013년까지 3년간 추적 조사한 결과다. 연구팀은 집 1㎞ 내에 신선한 채소나 과일을 구할 수 있는 가게나 시설이 있는지를 물었다. “전혀 없다”고 답변한 이들 중 3년 뒤 인지증에 걸린 사람은 9.9%에 달했으나 “아주 많다”고 답변한 이들 중 인지증에 걸린 사람은 4.8%에 그쳤다. 연구팀은 편의점과 음식점이 집 근처에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도 비교해봤으나, 인지증 발병률과의 연관 관계는 찾을 수 없었다. 연구팀은 신선 식품을 충분히 섭취하는 점도 중요하지만 장을 보기 위해서 외출하는 행동 자체가 운동 부족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지적했다. 식료품을 고르는 일련의 과정이 뇌에 자극된다고도 했다.

15일 정오께 나가쿠테시 쇼핑 재활 사업에 참여한 고령자들은 집에 돌아가는 차를 타기 위해서 지하 1층에 모였다. 수다를 떨고 있는 이들이 든 장바구니에는 빵이나 간단한 반찬류 정도가 담겨 있었다. 쇼핑센터가 아니라 편의점에서도 살 수 있는 물건들이었지만,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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