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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만물상] 사우디가 가스 수입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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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금융 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 9월 미국 노스다코타주 셰일(shale) 유전에 거대한 시추공이 박혔다. 수압 파쇄 방식의 신공법이었다. 시추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지하 3000m 암석층에 끼어 있던 검은 석유가 가스와 함께 솟아올랐다. 그날 미국은 금융 위기의 최악 국면을 지나고 있었다. 미국 자본주의가 망했다는 비관론이 울려 퍼지는 한편에서 '셰일 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훗날 한 미국 언론은 '우리는 망하는 그날 흥했다'고 썼다.

▶퇴적암의 일종인 셰일(혈암)층에 기름이 있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려졌다. 그러나 기술적 한계 때문에 캐낼 방법이 없었다. 미국의 혁신 기업가들이 온갖 시행착오 끝에 방법을 찾아냈다. 수천 m를 파고 내려간 뒤 90도를 꺾어 다시 수천 m의 수평 시추공을 박는다. 여기에 모래·화학품을 섞은 고압의 물을 쏘아 바위를 깨는 고난도 공법이었다. 미국 특유의 기업가 정신에 월가(街)의 풍부한 자본이 결합하자 상상도 못하던 에너지 혁명이 펼쳐졌다. 셰일 오일은 세계 도처에 있지만 오직 미국만이 셰일혁명을 누리는 이유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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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가 향후 20년간 미국산 셰일가스를 수입하겠다고 발표했다. 값싼 미국산 가스를 사다 발전소 연료로 쓴다는 것이다. 세계 최대의 석유 수출국이 수입에 나서는 상식 파괴가 벌어졌다. 툭하면 가스 밸브를 잠그겠다고 유럽에 엄포 놓던 러시아는 가스 수출 급감으로 경제가 쪼그라들었다. 석유 부존량 세계 1위 베네수엘라가 망한 것도 결국 셰일 오일 때문이다. 미국발(發) 셰일혁명이 세상을 바꿔놓고 있다.

▶셰일혁명 덕에 미국은 아킬레스건이던 '중동 콤플렉스'에서 해방됐다. 로키산맥 동쪽에만 세계 매장량의 60%에 달하는 셰일 오일이 매장돼 있다. 미국이 300년을 소비하고도 남을 분량이니 걱정할 게 없다. 미국은 이미 사우디를 제치고 세계 최대 산유국에 올랐다. 달러화, 군사력에 이어 에너지 패권까지 쥐었으니 겁날 것 없는 초(超)수퍼 파워가 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아랍권 반발을 무시하고 이스라엘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긴 것도 이런 자신감 덕분이다.

▶셰일혁명은 역설적으로 미국으로 하여금 세계에 대한 관심을 잃게 만들 것이라고 한다. 에너지 자급 능력을 갖췄으니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이 한반도에 대한 관심을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 한·미 동맹을 안보의 기둥으로 삼고 있는 우리로선 셰일혁명이 일으키는 새 국제 질서가 예사롭지만은 않다.

[박정훈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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