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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백영옥의 말과 글] [100] 끼니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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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백영옥 소설가


음식 담당 기자로 일하던 시절, 식당들을 취재하며 알아낸 맛있는 음식의 비결이 있다. 뜨거운 음식은 뜨겁게, 차가운 음식은 차갑게 내라는 것이다. 온도는 맛의 기본이다. 하지만 음식을 더 맛있게 하는 비결이 있다. 음식 안에 시간과 계절을 담아야 한다. 오래 발효된 장이 깊어지는 것도, 김치가 숙성되는 것도, 오래된 차가 맛있어지는 것도 그런 이치다.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에서 3년 연속 최고 레스토랑으로 꼽힌 덴마크 코펜하겐의 '노마'는 앉아 있는 이곳이 스칸디나비아이고, 지금이 겨울이거나 봄임을 알려주는 식재료를 쓴다. 흥미로운 건 이 레스토랑을 움직이는 스태프 중 놀랍게도 야생 베리나 버섯, 청어, 순록 등을 모으고 잡는 '전문 채집가'와 '어부' '수렵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노마'가 몇 년 전부터 실험을 감행했다. 레스토랑에서 쓸 식재료를 직접 가꾸고 키우는 농장을 만든 것이다. 흥미로운 건 식당에서 쓸 채소 몇 가지를 키우는 걸 뛰어넘어, 스테이크에 쓸 염소와 돼지, 소를 방목해 직접 키우는 실험적 레스토랑 역시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적 레스토랑 가이드북인 '미슐랭'도 이런 식당을 점점 더 주목하고 있다. 이런 경향성은 건강한 먹거리와 함께 공장식 집단 가축 사육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사찰 음식을 취재하기 위해 문경의 대승사 윤필암에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사찰 음식을 먹는다는 건 재료의 원형질과 한계를 동시에 먹는 일이란 걸 알았다. 특정 시기가 지나면 질기고 써져서 못 먹는 것이 봄에 피어나는 나물의 한계인 동시에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이걸 알고 나면 음식은 '때우는 것'이 아닌 '음미하는 것'으로 형질 변환된다.

윤필암 공곡 스님이 밥을 먹다가 “지금 우리가 봄을 먹는군요~”라고 말한 건 시인의 은유가 아니라 사실에 가깝다. 우리가 먹은 건 음식이 아니라 계절이며, 혹독하고 매서운 겨울을 뚫고 기어이 싹을 틔운 봄의 초록 기운이기 때문이다. 이때 음식은 몸을 살리는 약이 된다.

[백영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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