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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아아, 내가 미쳐… 아빠의 짝사랑이 '흑마늘' 쌤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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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누가 봐도 연애소설] 쉰한 살 아빠는 짝사랑 중

조선일보

이기호·소설가


미친 거 아니야!

나로선 그런 반응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빠가 사랑에 빠지다니, 우리 아빠가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뺏기다니….

그래, 그건 뭐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아빠는 이제 겨우 쉰한 살이고, 거의 십 년 가까이 연애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이니까.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농담 삼아 아빠에게 빨리 연애 좀 하라고, 헤어스타일도 8:2 가르마 같은 거 하지 말고, 제발 양복바지에 흰 양말 좀 신지 말라고,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연애는 하되 결혼은 하지 마, 아니, 결혼이 꼭 하고 싶으면 나 대학 들어가고 나서 그때 하고. 이제 몇 년 안 남았잖아? 그리고 결혼을 하더라도 동생은 낳지 말아줘. 내가 이 나이에 동생 생기는 건 좀 그렇잖아? 그러니까 너무 젊은 여자하곤 연애하지 말고…. 내가 그렇게 쫑알거릴 때마다 아빠는 조금 귀찮은 표정이 되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알았어, 알았어. 그러니까 아빠 빨리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게 너도 꼭 대학 가고…. 재수하지 말고."

그러니까 내 말은 아빠가 연애한다고 해서, 내가 결코 삐치거나 옹졸한 마음을 품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내가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한데, 왜 하필 상대가 그 여자란 말인가…. 그것도 제대로 된 연애도 아닌 짝사랑 상대가….

구청 교육지원과에 근무하는 아빠는 십 년 넘는 세월 동안 혼자 힘으로 나를 키웠다. 엄마는 내가 여섯 살 때 혈액암을 앓다가 돌아가셨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엄마에 대한 기억은 없다.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딱히 불편하고 우울하게 지낸 건 아니었다. 그만큼, 그 빈자리만큼, 아빠가 다 채워줬기 때문이다. 아빠는 나 때문에 일부러 구청의 한직만 전전했고, 윗사람 눈치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정시 출근, 정시 퇴근만 고집했다. 단 한 번도 내 아침밥을 거른 적이 없었고, 내 속옷은 늘 손빨래해 주었다. 그런 아빠 때문인지 나는 남들 다 앓는다는 '중2병'도 무난하게 넘어갔다.

"중2병이라는 게 원래 피곤해서 생기는 거거든. 한참 잠 많은 나이에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온종일 앉아 있기만 하니까 짜증이 나지. 집에 오면 무조건 자! 뭘 하려거든 한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서 해."

솔직히 나는 아빠가 혼자 딸을 키우느라 성적 정체성도 바뀐 게 아닐까, 염려했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 연애하라고 했던 것인데….

조선일보

일러스트= 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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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짝사랑에 빠진 상대는 내가 다니는 '정석수학학원'의 부원장인 '흑마늘' 강주원 선생이다. 아빠와 비슷한 또래인 건 분명하고 또 지금까지 결혼도 하지 않은 것 역시 확실했다. 몸은 마른 편이고 턱은 좀 긴 편인데 특이하게도 항상 머리카락을 다크블루로 염색하고 마스카라를 진하게 그리고 다녔다. 옷도 항상 검은색 정장만 고집했고. 그래서 별명은 '흑마늘'. 생긴 것만 '흑마늘'이 아니고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나 행동도 흡사 '흑마녀'와 같았다. 주간 평가 성적이 나오는 날이면 가만히 말도 하지 않고 아이들을 노려보기만 했다. 그러곤 딱 한마디.

"돈값 해!"

누가 수학 선생 아니랄까 봐 '차갑기'가 꽁꽁 언 노르웨이 고등어 저리 가라였다. 그런 '흑마늘'을 도대체 왜? 아빠가 수능을 다시 볼 것도 아니면서 왜? 삼계탕 먹을 때 마늘도 따로 빼놓고 먹는 아빠가 왜? 왜! 왜!

낌새는 지난달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 학원이 끝나는 밤 10시에 차를 대고 나를 기다리던 아빠가 자꾸 건물 안까지 들어와 데스크 앞에 앉아 있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려면 차를 따로 주차까지 해야 했는데도, 아빠는 계속 학원 안에서 기다렸다. 그러곤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 힐끔힐끔 다른 강의실을 엿보기도 했다.

"미주야, 너 그 수학학원에 강주원 선생님 말이야…." "응, 흑마늘. 흑마늘이 왜?"

"흑마늘? 아니, 그 선생님이 참 괜찮아 보여서 말이야…. 스타일도 멋있고…."

"스타일? 웬 스타일? 아빠 요새 눈이 좀 안 좋아졌나? 색약인 거 아니야?"

그때는 그냥 아빠가 요새 좀 피곤한가, 하고 넘어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제대로 추궁하지 못한 내 잘못이 크다. 아빠는 그로부터 다시 며칠 후, 제대로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아빠가, 우리 학원 자유게시판에, 그것도 내 아이디로, '강주원 선생님, 최고!' 운운하는 글을 올린 것이었다. 아니, '강주원 선생님, 최고!'라는 말도 촌스럽기 그지없는데, 그걸 왜 내 아이디로 남기냔 말이다. 그 글을 본 친구들이나 다른 학원 선생님들이 나를, 이 성미주를,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겠냔 말이다. 나는 그 글을 보자마자 폭발해서 아빠부터 찾고 말았다.

"아빠, 미쳤어? 아빠 도대체 왜 그래? 이게 뭐야!"

"아니, 나는 그 선생님이 정말 좋은 거 같아서…."

"좋긴 뭐가 좋아? 아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내 아이디로 남기느냐고!"

"……"

"아빠, 혹시 흑마늘 좋아해?"

"……"

"아, 나 정말 미쳐…."

나는 게시판에 올린 글을 삭제하고 두 눈을 감았다. 아빠는 계속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아빠는… 그 선생님이 가끔 네 성적 문제로 카톡을 보내주시는데… 그 내용이 정말 좋아서… 널 많이 생각해주는 거 같아서… 그래서 그런 거지."

"정말 그게 전부야? 다른 마음은 없고?"

내가 계속 다그치자, 아빠가 천천히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한 번 따로 뵈었으면 좋겠다고 카톡을 보냈는데… 딱 한 번 그렇게 보냈는데… 그 뒤로 말씀이 없으시네…."

아아, 내가 미쳐…. 학원을 진짜 옮기든지 해야지….

그건 그렇고 우리 아빠 진짜 어쩌면 좋니? 이렇게 '연애무식자'가 되어 버렸으니…. 나는 '흑마늘'이 미웠지만, 어쩐지 아빠가 짠해 보이기도 하고,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서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가만히 아빠를 마주 보며 앉아 있기만 했다.

[이기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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