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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삶과문화] ‘자기혐오’ 넘어 ‘자기공감’의 시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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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혐오’에 익숙한 현대인들 / 자신에 대한 공감능력 떨어져 / 끊임없이 마음의 안부 물으며 / 나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야

“마음아, 잘 있니?” 문득 감정이 잘 다스려지지 않을 때마다, 나는 스스로 이렇게 질문하곤 한다. 마음의 안부를 묻지 못할 때는 고통스러운 상념에 빠져 지하철역을 몇 정거장이나 지나치기도 하고, 분노가 조절되지 않아 소중한 사람에게 말실수를 한 뒤 오랫동안 미안함에 고개를 들지 못하기도 한다. 이렇게 마음의 고삐를 놓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겐 마음의 안부를 물을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가 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필요하다. “마음아, 잘 있니”라고 물었을 때, 한동안 마음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을 때는 마음에서 날카로운 대답이 들려온다. “이제 와서 내 안부를 묻는 거야? 이미 물은 엎질러졌어. 아까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한 건 잘못이야.” 하지만 아직 늦지는 않았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바로잡을 기회가 남아 있는 한, 살아 움직이며 내 삶을 바꿀 기회가 남아 있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마음의 안부를 물으며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

세계일보

정여울 작가


상처에 취약한 마음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더 높은 방어벽을 쌓느라 오히려 진정한 소통의 기회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마음의 안부를 묻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마음은 미래의 고통에 더욱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다. ‘공감의 과학’을 쓴 심리학자 베르너 바르텐스는 진정한 마음챙김의 비결로 ‘자기 공감’(self-compassion)을 제안한다. 자기 공감을 잘하는 사람은 공포나 우울에 휘둘리지 않으며 회복탄력성이 높아져 상처의 자기치유 속도가 높아진다. 반대로 자신을 탓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해친다. ‘난 역시 안 돼’라는 식의 ‘자기혐오’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타인에 대한 공감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공감능력도 떨어진다. 무한경쟁의 압박 속에서 ‘아무리 잘해도, 다음번엔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자기를 격려하는 마음챙김의 기술을 잃어가고 있다. 실패를 용납하지 못하고, 실수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타인의 애정 어린 조언조차도 한사코 밀어내는 사람들은 사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맺기’에 서툰 것이다. 무조건 진통제나 안정제부터 찾고, 마음을 보살피지 않은 채 병원부터 찾는다면, 자기와의 주체적인 관계맺음을 시작할 수 없다.

자기와의 관계맺기에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에고(사회적 자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셀프(내면의 자기)의 대화다. 예컨대 상처를 입었을 때 이것이 ‘에고의 차원’인지 ‘셀프의 차원’인지 돌아보는 것이다. 에고의 차원에서 상처를 입었을 때는, 살짝 자존감에 상처가 난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에고의 아픔은 부분적인 상처이며 치료 가능한 상처다. 하지만 셀프 차원의 상처라면 더 깊은 마음챙김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에고에 상처를 입었는데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것은 셀프가 약하기 때문이고, 셀프에 상처를 입었는데도 제대로 돌보지 않고 ‘난 괜찮아’라고 주장하며 자신까지도 속인다면, 스스로의 상처에 둔감해짐으로써 자기 공감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에고와 셀프의 대화가 필요하다. 에고가 ‘너 정말 괜찮니’라고 물었을 때 ‘난 괜찮지 않음’을 인정하고,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슬픔을 이겨낼 거야’라고 속삭이는 셀프의 깊은 위로로 자기공감은 시작된다.

에고와 셀프가 서로 갈등하기보다는 서로 깊이 공명할 때, 우리는 에고와 셀프가 철저히 분리될 위험에 처해 있는 현대사회에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다. 에고가 과잉되게 발달한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 휘둘린다. 에고는 타인의 인정과 칭찬을 먹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셀프는 다른 사람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는 내면의 깊은 자기인식의 총합이다. 트라우마와 스트레스에 휘둘리는 사람들은 셀프가 견고하지 못하다. 나는 에고 차원에서는 끊임없이 상처받지만, 셀프 차원에서는 내가 더욱 강인하고 지혜로운 존재임을 배워가는 중이다. 그토록 수많은 상처를 입고 휘청거렸음에도 나는 오늘도 기쁘게 깨닫는다. 나는 트라우마보다 강인한 존재임을. 나는 그 어떤 트라우마에도 결코 지지 않았음을.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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