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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재기의 천년향기](26)처마 끝에 활짝 핀 연꽃시대 따라 천 가지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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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기와 ‘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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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성을 내포한 다양한 무늬의 기와인 와당에는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 당대 역사와 문화가 아로새겨져 있다. 사진은 위에서부터 고구려·백제·신라·통일신라(이상 2점씩), 발해·고려·조선시대의 ‘연꽃무늬 수막새’다. 같은 무늬지만 시대별 특성이 드러난다.


무늬 새긴 기와·처마 끝 ‘막새’

통틀어 부르는 ‘와당’, 연꽃·용·두꺼비 등 무늬 다양…

악귀 쫓는 ‘귀면’, 대문·기둥에 달기도

역동·우아·화려함, 삼국시대엔 각 나라 특색 고스란히 드러나…

실용 중시한 조선은 이전보다 세련미 뒤져

신라의 얼굴 ‘천년의 미소’, 기와 단독으로 첫 국가문화재 지정…

흔히 출토되지만, 자세히 보면 끝이 없는 유물


조선 후기의 대표적 문인화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국보 180호) 화면 오른쪽 밑에는 붉은 인장이 찍혀 있다. 인장 속 글자는 ‘長毋相忘’(장무상망).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이다. ‘장무상망’에는 제주도에 유배 중이던 추사와 제자 이상적 사이의 속깊은 뜻이 녹아 있다. 그런데 ‘장무상망’ 글자의 유래를 따져보면 2000여년 전의 중국 한나라 때 기와에 닿는다. 한나라 유적에서 발굴된 와당에 새겨진 글자였다.

기와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암키와·수키와로도 나눌 수 있다. 기와지붕을 보면 암키와가 연결된 기와골과 수키와로 이어진 기와등이 처마에서 마무리되는데, 처마 끝의 마지막 기와를 막새라 한다. 마지막 암·수키와가 암막새·수막새다. 이 막새는 대부분 동식물, 글자 같은 각종 무늬를 새겨놓은 면이 있어 장식기능도 한다. 이 같은 암·수막새와 무늬가 있는 기와를 통틀어 와당이라 부른다(막새·막새기와라고도 한다). 기와는 유적 발굴현장에서 많이 나오는 유물이다. 선사시대 유적에서 토기편들이 많다면 역사시대의 유적, 특히 건물터에선 기와편들이 쏟아진다. 기와가 덮고 있던 건축물은 사라지더라도 1000도 내외의 온도로 구워진 기와는 수백, 수천년 동안 남아 있어서다.

비교적 흔한 유물인 와당. 하지만 ‘눈 밝은 사람’은 깨진 와당 한 조각에 새겨진 무늬에서 한 시대의 역사와 문화, 당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읽어낸다. 시대에 따라 무늬의 양상이나 표현법, 형태와 제작기법, 미의식 등이 다르기에 눈여겨보면 그 차이가 드러나서다. 지름 15㎝ 내외의 자그마한 와당 한 조각은 삼국시대 이래 지금까지 장구한 역사와 문화가 녹아 있는 소중한 문화재인 것이다.

■와당, 시대별 특성을 품다

기와의 역사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3000여년에 이른다. 기원전 11세기쯤인 중국 서주시대 기와가 있다. 빗물 등의 침투를 막는 기능성 건축부재로 개발된 기와는 후대로 오면서 와당이 나오는 등 장식적 기능이 더해진다. 기와가 건물 주인의 권위, 경제력 등을 상징하는 것이다. 전국시대 제·연나라 등의 유적에서도 와당이 발굴되지만, 보편화된 것은 한나라 때로 본다. 한반도에는 기원전 1세기 전후 들어와 삼국시대부터 본격 활용됐다. 이후 기와는 한국 전통건축의 미적감각을 드러내는 중요 요소로 작용했다. 이 땅에서 발굴된 가장 오래된 와당은 한나라가 기원전 108년에 설치한 낙랑군의 영역에서 나온 것들이다. 중앙에 ‘낙랑예관’(樂浪禮官)이란 글자를 새기고 주변에 구름무늬를 앉힌 수막새가 대표적이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각국의 특성이 반영된 와당을 만들었다. 특히 수막새 무늬는 삼국시대는 물론 고려~조선~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에 걸쳐 계속 활용되고, 시대에 따라 특성들이 나타난다. 당대 시대상과 미적감각, 기술력 등이 반영됨으로써 고고학, 미술사 등 학술적으로 귀중한 자료인 것이다. 와당의 무늬는 저마다 상징성을 지녔으며, 특히 연꽃·식물넝쿨(당초문)·인동초·포도 등 식물이 많다. 연꽃무늬는 불교문화 속에서 와당뿐 아니라 건축, 공예 각 분야에서 널리 응용됐다.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돼 그리스, 중앙아시아, 중국 등을 거쳐 전래된 넝쿨무늬는 지금도 활용된다. 동물무늬로는 용·기린·봉황 같은 상상의 동물, 오리·두꺼비·박쥐 등으로 다양하다. 또 기하학무늬 등도 있으며, 험상궂은 표정의 기괴한 동물무늬의 귀면 기와는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상징으로 쓰였다.

고구려 와당은 실물과 더불어 안악3호 무덤, 장군총 등 고분벽화 속에서도 볼 수 있다. 회색·회갈색의 수막새가 많고, 귀면 기와인 짐승얼굴무늬 수막새 등도 남아 있다. 고구려 와당의 인상은 굳건해 보인다. 선이 굵거나 예리한 데다 각종 무늬의 표현에서도 양감이 돋보인다. 고구려의 다른 미술품에서도 드러나는 이른바 역동성이 두드러진다.

백제시대 와당은 초기 도읍지인 한성(서울)의 풍납토성을 비롯해 웅진(공주), 사비(부여) 도읍지에서 출토된다. 와당의 무늬들도 부드럽고 우아하다는 보편적인 백제 미학이 구현됐다. 연꽃무늬 수막새의 경우 꽃잎 끝부분이 살짝 올라온 반전수법이 도드라진다. 무늬 표현에서 백제적 특징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웅진시기(475~538년)로 사비시기(538~660년)에는 더욱 발전된다. 공주의 무령왕릉이나 정지산 유적·대통사지, 익산의 미륵사지 등에서 많은 와당이 발견됐다. 백제는 위덕왕 때인 6세기 후반 일본에 각 부문 전문기술자들을 보내면서 기와 전문가인 와박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신라도 수막새들이 전해지는데 간결하고 담백한 인상이다. 백제·고구려 영향이 풍긴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기와문화의 꽃’이 피었다 할 정도로 크게 활성화된다. 형태가 다양해지는 것은 물론 조형적으로도 수준이 크게 높아진다. 꽃잎무늬의 경우 꽃잎들이 중첩되면서 화려함을 특징으로 하는 보상화무늬가 불교미술품을 비롯해 와당, 전돌에서도 보인다. 보상화무늬는 연꽃·넝쿨무늬 등과 함께 사용, 화려함을 더하기도 한다. 유약을 바른 것도 있고, 서역 문화와의 교류 흔적도 나타난다. 경주 월지(안압지), 여러 사찰터에서 발굴된 것이 대표적이다. 암막새도 여럿 전하는데 빼어난 수준을 자랑한다. 통일신라 당시 북쪽에 자리 잡은 발해도 고구려 영향을 크게 받은 다양한 형태의 와당들을 만들었다.

고려시대에는 청자 와당이 등장한다. 역사서 <고려사>에는 고려 의종 때인 1157년에 ‘양이정이란 정자를 짓고 지붕을 청자로 이었다’는 내용이 전한다. 실제 청자 와당이 남아 있는데, 당시엔 궁궐 등 극히 제한적으로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미적인 부분이나 장식성보다 실용성, 기능적 측면이 강조되면서 와당문화가 변한다. 무늬는 다양하지만 표현 수준이 이전 시대보다 떨어진다는 평가다. 특히 문자를 새긴 와당이 많으며, 형태적으론 수막새의 아래쪽이 앞으로 튀어나오는 특징도 보인다.

‘귀면’ ‘도깨비 기와’라고도 부르는 짐승얼굴무늬 와당도 주목된다. 고구려 초기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는데 악귀를 물리치듯 부릅뜬 눈과 큼직한 코, 크게 벌린 입 등 하나같이 무섭고 험상궂은 표정들이다. 때론 해학적이기도 하다. 둥그런 수막새와 달리 네모난 형태도 많은 이 와당은 못을 박은 구멍이 있는 경우가 많아 지붕은 물론 대문, 기둥 등에 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와를 구운 가마터(와요지) 유적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것이 전국 곳곳에 남아 있다. 지금도 여전히 활용되는 기와는 기와제작 장인인 ‘제와장’, 지붕의 기와를 잇는 장인인 ‘번와장’이 각각 국가무형문화재 91호·121호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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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쪽부터 아름다운 무늬의 통일신라시대 암막새, 고려시대 청자 수막새, 통일신라시대 짐승얼굴무늬 기와(귀면), 낙랑군 시기의 ‘낙랑예관’ 수막새, ‘신라의 미소’로 불리는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보물 1020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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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수록 흐뭇한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

와당은 출토되는 양에 비해 연구는 뒤늦었다.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이 먼저 주목했으나 해방 이후 연구는 미진했다. 제대로 본격화된 것은 연구자들이 많아지고 자료도 풍부하게 확보된 1980년대로 본다. 1990년대 들어서는 연구의 체계화가 이뤄졌고, 2000년대에는 와당을 주제로 한 제대로 된 특별전까지 마련됐다. 마침내 2003년에는 기와 연구자들이 ‘한국기와학회’를 설립했다. 특히 2008년에는 ‘검사 출신의 기와 박사’로 유명한 유창종씨가 와당전문박물관인 ‘유금와당박물관’을 개관, 와당의 의미와 가치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와당 연구는 국제적으로 확대되는 수준이다.

삼국시대부터 전해지는 수많은 와당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다. ‘신라의 미소’ ‘천년의 미소’라고도 표현되는 수막새는 은은하게 웃는 얼굴이 압권이다. 왼쪽 아랫부분이 없어졌지만 위로 살짝 들린 입꼬리와 도톰한 입술, 눈과 코, 이마와 턱선의 표현에서 장인의 빼어난 미의식과 수준 높은 기술이 읽힌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이 와당은 다른 와당들과 기와틀이 아니라 손으로 상당 부분 빚은 것으로 보인다. 원래 지름은 14㎝지만 현재는 11.5㎝만 남아 있으며, 두께는 2㎝다. 지난해 보물 2010호로 지정됐는데, 기와가 단독으로 국가지정문화재가 된 것은 처음이다. 이 수막새는 일제강점기 영묘사(현 흥륜사) 터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4년 일본인 의사인 다나카 도시노부가 경주의 골동품점에서 구입·소장하다가 일본으로 갖고 갔다. 이후 박일훈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의 끈질긴 노력으로 1972년 10월 마침내 일본에서 기증 형식을 통해 돌아온 환수문화재다. 뒷면을 자세히 보면 수키와의 몸통 흔적이 남아 있어 실제로 사용된 것이다. 제작 시기는 7세기 후반 무렵으로 추정한다.

와당은 유구한 역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와당 무늬에는 시공을 넘어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이 상징화돼 있다. 건강이나 장수, 부귀영화, 출세, 악귀를 쫓고 복을 구하는 마음 등이다. 인간 고유의 능력인 상징화의 응축물인 와당 무늬들은 실제 현대의 각종 디자인 콘텐츠로 활발하게 응용된다. 또한 21세기 예술적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한다. 시인 이봉직은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를 보고 동시 ‘웃는 기와’를 지었다. ‘옛 신라 사람들은/ 웃는 기와로 집을 짓고/ 웃는 집에서 살았나 봅니다/ 기와 하나가/ 처마 밑으로 떨어져/ 얼굴 한쪽이/ 금 가고 깨졌지만/ 웃음은 깨지지 않고/ 나뭇잎 뒤에 숨은/ 초승달처럼 웃고 있습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한 번 웃어 주면/ 천 년을 가는/ 그런 웃음을 남기고 싶어/ 웃는 기와 흉내를 내 봅니다’. 이렇게 와당은 박제되지 않고 지금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문화재다.

사진제공 국립 중앙·경주박물관, 문화재청

도재기 문화에디터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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