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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편 가르거나 혐오하거나… 디지털 시대, 읽기의 함정 [광화문에서/김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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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종이 매체의 글을 집중해 읽는다는 건 언제부터인가 사치재가 되어버렸다. 읽을 시간도 있어야 하고 마음의 여유도 있어야 가능한 일이 됐다. 스마트폰이나 PC 등 디지털 매체로는 엄청난 양의 정보를 소비하면서 말이다.

인지학자들은 디지털 읽기가 확산되면서 인류의 읽기 패턴도 바뀔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글을 얼마나 잘 읽는지는 얼마나 깊이 읽는지에 달렸는데, 디지털 매체의 특성상 집중의 질(質)이 낮아지고 결국 ‘깊이 읽기’가 어려워질 확률이 크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디지털로 무언가를 읽으려다 보면 수시로 클릭 유도 글이나 팝업 창이 뜨고 사려고 망설였던 물건이 갑자기 번득인다. 쇼핑몰에 접속한 인터넷 기록(쿠키)이 남아 영악한 광고로 변신한 것. 밀려오는 글을 다 읽어야 한다는 쓸데없는 의무감이 생기기도 한다. 결국 과다한 정보와 각종 자극 등으로 끊임없이 주의를 환기해야 해서 제대로 읽기가 힘들어진다.

문제는 글 자체에 집중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 디지털로 글을 읽는 사람의 시선을 추적하면 화면에 ‘F’자 형태가 나타난다. 처음 두어 줄을 지그재그로 읽다가 결론으로 휙 내려가는 방식이다. 띄엄띄엄 읽는 만큼 이해력도 떨어진다.

이를 뒷받침하는 실험도 있다. 노르웨이 연구진이 10대 학생들에게 이들이 좋아할 만한 주제의 단편 소설을 골라 절반은 디지털로, 절반은 종이책으로 읽게 했다. 실험 결과 종이책으로 읽은 그룹이 디지털로 읽은 그룹보다 시간순대로 줄거리를 재구성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이런 F자형 읽기는 디지털로 기사를 읽은 뒤 댓글을 읽거나 댓글을 달 때에도 도드라진다. ‘댓글을 많이 다는 사람들은 정작 기사 본문을 많이 읽지 않는다. 제목만 읽거나 기사 일부만 보고 바로 댓글을 다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댓글에도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쓰는 대신 다른 사람의 댓글에 집중적으로 의견을 달거나 상대를 비방한다.’

이는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최근 자사의 댓글을 분석한 결과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기사 본문과 무관하게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의 편을 드는 정파적인 댓글이 넘쳐나고 특정 집단을 혐오하거나 일부 지역을 비하하는 댓글이 쏟아진다. 분열과 혐오로 민주주의가 후퇴할 여지가 있는 대목이다.

미국의 인지신경학자인 매리언 울프는 저서 ‘다시, 책으로’에서 디지털로 읽다 보면 비판적 분석적 사고가 약해지고 타인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또 인지과부하로 우리 뇌는 정보를 단순화하거나 최대한 빠르게 선별해 훑어버리고 잊어버리는데, 이로 인해 가짜뉴스를 판별하는 능력도 취약해진다고 한다.

한국인 10명 중 8명은 이제 모바일로 기사를 접한다. 또 10명 중 4명은 1년에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는다(참고서와 교과서 등을 제외하고 말이다). 깊이 읽는 습성은 시민들이 비판적인 사고와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충분히 토론하며 이뤄가는 숙의 민주주의의 토대가 될 수 있다. 디지털로 읽더라도 허둥지둥 산만하게 읽는 것을 피해야 할 이유다. 이 글을 디지털로 읽고 있다면, 혹은 앞에 두어 줄 읽다가 이 부분으로 넘어왔다면 종이 매체와의 호사스러운 접촉을 한 번쯤은 꿈꿔 보시라. 책이든 잡지든 신문이든 무엇이든 좋다.

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ab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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