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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먹거리 공화국]눈물겨운 ‘양봉 산업 육성법’ 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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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 철이다. 집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도 아카시아 향기가 훅하고 들어온다. 완충녹지로 남은 야트막한 야산에서 날아오는 향기다. 노인들의 구술에서는 종종 아카시아꽃 이야기가 나온다. 보릿고개에 배가 고파 아카시아꽃을 따먹곤 했는데 빈속이어서 나중에는 속이 아리더라는 배고픈 시절의 이야기다.

경향신문

아카시아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밀원식물이다. 벌꿀의 70% 이상을 아카시아에서 얻는다. 꽃을 따라다니며 꿀을 채취하는 이동 양봉농가 다수가 아카시아꽃을 따라다닌다. 밤꿀이니 유채꿀이니 하는 것들은 꿀벌들이 주로 어떤 꽃에서 꿀을 따왔는지, 즉 밀원에 따라 붙인 이름이다. 이 외에 메밀, 들깨도 중요한 밀원식물이다. 반대로 한 군데에서 계속 꿀농사를 짓는 고정 양봉은 온갖 꽃들에서 꿀을 모아 오기 때문에 ‘잡화꿀’이라고도 하고 ‘야생화꿀’이라고도 한다. 이런 꽃꿀 말고 벌에게 설탕물을 먹여서 얻는 ‘사양꿀’도 있다. 가축을 먹여 기른다는 뜻의 ‘사양’이다. 설탕물로 만들어서 꽃향도 나지 않는 사양꿀이 무슨 꿀이냐며 양봉농가와 토종꿀을 생산하는 한봉농가에서는 불만이 많다. 소비자들은 사양꿀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설탕꿀’로 이름을 바꿔 달라는 청원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가격이 저렴하다보니 가공식품이나 디저트업계에서 많이 쓴다.

감미료 정도로 여겼던 벌꿀의 세계도 복잡다단하다. 양봉도 ‘축산업’이다. 동물에게 사료를 먹여 그 부산물을 챙기는 것이 축산업이라면 양봉도 당연히 축산업이다. 벌에게도 꽃이 없는 겨울에는 사료를 먹인다. 꽃가루와 설탕 등을 떡처럼 만든 ‘화분떡’을 먹이고 설탕물을 먹여 돌본다. 깨끗한 물도 줘야 한다. 또한 전염병을 막기 위해 방제작업도 해야 한다. 토종꿀 농사를 짓는 한봉농가를 위협하는 낭충봉아부패병은 토종벌만 공격해 2009년 토종벌 90% 정도를 집단 폐사시킬 정도로 무서운 제2종 가축전염병이다. 구제역이나 AI로 소나 돼지, 닭이 살처분되면 큰 충격을 받고 여론이 들끓지만 작은 꿀벌들에게 일어난 일은 잘 모르고 지나간다. 며칠 전 낭충봉아부패병 발생 소식이 들려와 한봉농가들은 긴장 중이다.

꿀벌의 역할은 꿀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벌은 생물다양성의 파수꾼이다. 꿀도 따고 몸에 묻은 꽃가루 덕분에 수정을 한다. 친환경 농업에도 수정벌의 역할이 중요하다. 시설로 차단되어 벌이 들어오지 못하지만 벌통 하나 가져다 놓으면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는다. ‘수정벌 참외’라고 자랑스레 내거는 이유도 벌이 그만큼 환경에 민감해서다. 토마토 농사를 지었던 우리집에서 고된 노동 중 하나가 ‘꽃찍기’였다. 호르몬제인 수정액을 일일이 토마토꽃에 바르거나 뿌리는 일이다. 수정벌만 있으면 해결될 일이었건만. 그런 생고생을 했다니.

양봉과 농업은 공생의 관계지만 갈등도 일어난다. 한창 꿀을 모아 오는 꽃철에 예고도 없이 농약을 살포해서 벌이 죽는 일 때문이다. 근래엔 항공방제도 꿀벌에게는 큰 위협요소다. 여타의 가축처럼 사육밀도의 문제도 불거지고 있다. 밀원인 꽃은 부족한데 양봉은 많이 늘어나 밀원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동안 양봉농가의 법적 지위는 취약했고 제도적 지원도 미비했다. 한국의 양봉 역사 100여년 만에 ‘양봉산업의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뒤늦게나마 발의되었다. 눈물겨운 벌꿀, 아니 꿀벌의 인정투쟁이었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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