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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정찬, 세상의 저녁] 김재규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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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정찬
소설가


1980년 5월24일 새벽 4시 사형수 김재규는 육군교도소 7호 특별감방에서 서울구치소 보안청사 지하실 독방으로 이감되었다. 사형이 집행된 것은 그로부터 3시간 후인 아침 7시였다.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지 나흘 만이었고, 계엄군이 ‘5월 광주’의 중심 공간인 전남도청을 점령하기 사흘 전이었다. 죄목은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수괴미수죄였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복숭아씨로 만든 염주를 두 손에서 놓지 않았다.

1979년 12월12일의 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은 이듬해 4월30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재규를 “아비를 죽인 자식과 다를 바 없는 패륜아”라고 말했다. 김재규는 최후진술에서 “작년의 부산과 마산 사태는 유신체제의 폭압에 대한 국민적 항거의 표본이었다. 부마사태의 본질과 확산 조짐에 대해 보고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항거가 거세지면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고 말했다”고 하면서 “우리에게는 다른 길이 없었다. 더 이상의 길이 없었다. 박 대통령은 나 개인에게 있어 사적으로 친형제나 다름없었다. 나는 나의 개인적 정분을 야수와 같은 마음으로 끊었다. 생명은 고귀한 것이며, 똑같은 것이다.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보다는 한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한겨레

김재규의 최후진술을 읽으면 떠오르는 이가 있다. 26살 청년 김상진이다. 유신정권이 형 확정 18시간 만에 인혁당 관계자 8명의 사형을 집행한 지 이틀 후인 1975년 4월11일 서울대 수원 캠퍼스에서 열린 구속학생 석방과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자유성토대회에서 축산학과 4학년 김상진은 유신 철폐를 외치며 할복해 다음날 숨졌다. 그는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에서 “죽음으로써 바라옵나니, 이 조국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에서 바라옵나니, 더 이상의 무고한 희생이 가지 않도록, 더 이상의 혼란이 오지 않도록, 숭고한 결단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간절히 호소했다.

나는 김상진의 죽음을 관악산 캠퍼스에서 들었다. 그가 실행한 죽음의 방식은 충격이었다. 당시 나는 문학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를 둘러싼 세계는 차가우면서 어두웠고, 불가해했다. 문학은 차갑고 어둡고 불가해한 세계 속에서 고요히 빛나는 별이었다. 문학이 빚는 꿈의 형상은 유한의 존재인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존엄성이었다. 역사의 존엄성도 언어가 품은 꿈의 존엄성을 따르지 못했다. 나에게 역사란 문학이라는 꿈의 주변부에 존재하는 풍경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풍경으로만 존재하는 역사는 나를 근원적으로 놀라게 하지 않았다. 상처와 운명을 자극하지도 않았다. 나의 꿈은 역사와 격절되어 있었다. 꿈과 역사가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그럼에도 나는 김상진의 죽음에 붙들려 있었다. 그의 죽음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내가 보였다. 무엇을 찾고 있었을까? 나는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 채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죽음은 인간의 운명에 내재한 궁극적 실체다. 어쩌면 나는 그가 선택한 ‘삼엄한 죽음’에서 궁극적 실체의 무게를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4년 반이 지난 1979년 10월26일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하자 그 비극적 사건과 김상진의 죽음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을 잇는 역사의 끈이 감각되었고, 그 감각은 풍경으로 존재할 뿐인 역사를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느리고 조심스러운 그 변화에 혁명적 충격을 가한 것은 ‘5월 광주’였다.

‘5월 광주’ 이전까지 나는 역사에서 개인의 실존을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왔다. 권력의 실존이 개인의 실존을 끊임없이 삼킴으로써 생명력을 확장해나가는 것이 역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이 꿈과 역사를 격절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5월 광주’는 그런 나의 생각을 깨뜨렸다. 개인의 실존이 권력의 실존을 삼키는 모습을 ‘5월 광주’에서 보았던 것이다. 그 힘의 원천은 희생이었다. 광주 시민의 죽음이 나에게 ‘순결한 실존’으로 다가온 이유는 희생적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이 역사와 맞설 수 있는 가장 도덕적인 무기가 ‘순결한 실존’임을 나는 ‘5월 광주’에서 확인했다.

어떤 죽음도 혼자의 죽음일 수밖에 없다. 동시에 어떤 죽음도 혼자의 죽음일 수가 없다. 이 죽음의 이중성이 하나의 모습으로 겹치는 때가 있다. 죽음이 희생을 품을 때다. 그 순간 ‘나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으로 변화한다. 그리고 그 죽음은 역사의 영혼이 된다. 김상진의 죽음과 함께 김재규의 죽음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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