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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朝鮮칼럼 The Column] 교과서에서 박물관으로 번진 역사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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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편은 좌파 정부의 제2차 역사전쟁, '기·승·전·촛불' 史觀 무대 될 듯

교과서가 이 전쟁 前方이라면 박물관은 後方인 셈… 대한민국, 여기서도 사라지려나

조선일보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광화문광장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내후년까지 전시 공간을 전반적으로 개편하기로 한 가운데, 지난달 초부터 연말까지 상설전시실의 문을 닫는다고 한다. 이는 2012년 12월 개관 이후 처음 있는 일인데, 작금에 문재인 정부가 벌이고 있는 '역사전쟁'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박물관 안팎의 이야기다. 이로써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을 앞세워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를 축소하는 이른바 '기·승·전·촛불' 사관(史觀)의 무대로 거듭날 전망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지금의 집권 세력이 애초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 자체를 강력히 반대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탄생한 것은 이명박 정부 때였다. 당시 진보·좌파 진영에서는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선양하고 대한민국 역사의 성공을 홍보한다는 이유로 현대사 관련 박물관 건립에 줄곧 시비를 걸었다. 그러다가 2년여 전 정권 교체 과정에서 막상 박물관을 접수하게 되자 자신들의 '역사정치' 무기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 전(前) 대통령 글씨가 담긴 건물 표석도 보란 듯 철거되었다.

돌이켜보면 역사전쟁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제1차 역사전쟁은 노무현 정부 초기 '교과서 파동'이라는 이름으로 발발했다. 2002년 제7차 교육과정에 따라 '한국 근·현대사' 과목이 새로 도입되면서 관련 교과서들이 출간되었는데, 그것의 친북 좌편향을 놓고 사회적 갈등이 심화된 것이다. 이들의 수정 여하를 둘러싸고 2008년부터 교과서 파동이 재차 격화되자 박근혜 정부는 2015년 10월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 방침을 결정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취임 직후 국정화 계획은 관련자 처벌과 함께 전면 백지화되었다. 좌파·진보 세력의 완승이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 공간 개편은 제2차 역사전쟁이라 볼 수 있다. 역사 교과서가 학교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역사를 처음부터 가르친다면, 역사박물관은 일반 국민이 역사를 다시 배우고 새로 익히는 곳이다. 만일 교과서가 역사전쟁의 전방(前方)이라면 박물관은 역사전쟁의 후방(後方)이라 말해도 좋다. 전방이 무너져도 후방은 남아 있지만, 후방이 넘어지면 모든 게 끝이라는 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요컨대 박물관, 특히 역사박물관은 단순한 취미나 여가생활, 교양이나 문화 영역으로 그치는 게 결코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박물관은 근대 이후 국가 건설 및 민족 형성의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정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에 의하면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 혹은 국민을 만드는 데 있어서 박물관은 인구총조사(센서스)나 지도(地圖) 못지않게 일등공신이었다. 박물관의 태생적 존재 이유가 사회 구성원의 정치적 소속감과 정체성 고취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물관을 '작은 조국'에 비유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국사(自國史)박물관의 위상은 국력과 국격에 비례하는 경향이 있고, 내로라할 만한 역사박물관 건립은 선진국 내지 강대국 진입의 징표가 되기도 한다. 2008년 건국 60주년에 즈음하여 이명박 정부가 현대사 관련 박물관을 짓기로 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비슷한 선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연방공화국 현대사에 초점을 맞춘 독일 '역사의 집'이다. 최초 제안자 헬무트 콜 총리의 의중대로 서독의 '성공한 역사'가 알게 모르게 반영되긴 했지만, 독일의 경우 역사 인식의 다원적 관점은 최대한 관철되었고 정치적 독립도 철저히 보장되었다. 이런 원칙과 기준에서 보자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지난 행적에 부족하고 미흡했던 부분이 하나도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노골적인 우파 역사 홍보관으로 일관한 것은 아니다. 현 정부의 적폐 청산 명부에 그 이름이 직접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 그 방증이다.

바야흐로 과거를 재현하는 패러다임이 역사에서 기억으로 이동하는 시대다. 이념 갈등 또한 기억의 투쟁으로 전환하는 시대다. 이런 점에서 작금의 제2차 역사전쟁은 사실상 '기억전쟁'이다. 그런 만큼 대표적인 '기억의 장소' 박물관이 새로운 전장(戰場)으로 부상하는 것은 예견된 일이다. 그럼에도 제1차 교과서 역사전쟁에서 당한 패배의 충격 탓인지 '박물관 정치'에 대한 보수 우파 세력의 관심은 너무나 저조하다. 교과서에 이어 박물관에서도 대한민국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잊히고 있다. 개인이든 국가든, 기억이 없으면 존재도 없는데 말이다.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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