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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사설] ILO 핵심 협약 비준, 사회적 합의가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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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가 최저임금 과속 인상과 일률적 주 52시간제를 몰아붙이더니 이번에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 비준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면서 경제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어제 “아직 비준되지 않은 ILO 4개 핵심 협약 중 3개 협약에 대해 비준을 추진하겠다”며 “비준 동의안을 정기국회에 제출하겠다”고 했다. 결사의 자유 보장과 강제노동 금지를 담은 3개 협약은 전교조의 합법화, 실업자·해고자의 노조 결성과 파업 등과 관련된 민감한 내용들이어서 발효될 경우 산업 현장에 미칠 파장은 엄청나다.

ILO 협약은 노동 관행에 관한 국제 표준으로 개별 국가에서 사용자와 근로자 합의를 전제로 추진되는 것이 마땅하다. 나라마다 경제 여건과 고용 환경이 달라 일률적으로 도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자유무역협정(FTA)이 확산하면서 노동 관행도 상대국과 같은 조건으로 맞추는 국제적 추세를 반영해야 하는 것도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ILO 핵심 협약을 한국의 특수성만 내세우며 한없이 미루는 게 능사는 아니다.

그런데도 유보돼 온 것은 왜일까. 한국에선 이들 제도를 도입할 여건이 아직 갖춰져 있지 않아서다. 그간 노동계는 4개 협약 모두 무조건 비준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에 경영계는 협약을 비준한 선진국과 같은 수준의 보완책을 요구했다. 파업 시 대체근로 허용, 사업장 점거 금지, 부당노동행위 폐지 등이다. 선진국과 달리 한국은 이들 제도가 전혀 도입돼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비준부터 하고 나면 노동계가 보완책을 받아들인다고 정부는 믿고 있는 건가. 민주노총은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경영계와 머리를 맞댔어야 할 최저임금 속도 조절 논의조차 거부했다. ILO 협약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전교조와 해고자 문제뿐만 아니라 협약 비준 즉시 산업기능 요원은 ‘강제노동’에 해당돼 일을 그만두고 군 복무를 해야 한다. 이런 사실조차 국내에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을 만큼 비준 준비가 안 돼 있다.

ILO 핵심 협약은 국내법과 상충해 법 개정이 필요한 데다 국회의 비준 동의 과정에서도 진통이 예상된다. 그럼에도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자 국정과제라는 이유만으로 비준을 강행할 경우 또 다른 갈등과 대립을 불러올 것이다. 혹여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이 정부의 지지세력인 노동계의 환심을 사려는 의도라는 오해까지 살 수 있다. 정부는 ‘묻지마 비준’을 재검토하고 사회적 합의와 법·제도를 먼저 마련한 뒤 비준을 논하는 게 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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