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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포럼] 총알이냐 사탕알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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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식량 136만t 부족, 10년 새 최악 / 외부지원 없으면 수백만명 굶주려 / 김정은, 연 33억달러 국방비 투입 / 정부 “재원, 민생에 투입” 설득해야

“국방공업에 자금을 돌리다보니 인민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하였으며 어린이들에게 사탕도 제대로 먹이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민들은 허리띠를 조이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의 행군시기 얼어 죽으면 죽었지 장군님 품을 떠나 남의 집 처마 밑으로는 절대로 들어서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장군님 품으로 더 깊이 안겨든 우리 인민들이었습니다.”

북한 조선노동당출판사가 2017년 4월 ‘자강력 제일주의를 구현하여 주체적 국방공업의 위력을 다져나가야 한다’는 제목으로 출간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담화문 내용이다. 김정은이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 정치과정에서 주민들이 배고픔을 겪은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김정일에게 변함없는 충성심을 보여준 주민들에 대한 고마움도 읽혀진다.

세계일보

김환기 논설위원

김정은은 담화에서 선군정치의 결과물인 국방공업의 발전을 김정일의 빛나는 업적으로 소개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사탕알(식량)이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총알(무력)이 없이는 살 수 없다’며 귀중한 자금을 국방공업 발전에 돌리시였습니다. 우리의 국방공업은 적들이 떠벌이는 군사 기술적 우세를 휴지장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선군정치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 30여만명의 아사자를 낳았지만 결국은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무력 중시 정책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도 드러난다. 이에 비추어 보면 김정은의 핵 무력 완성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제2의 고난의 행군’ 우려가 제기된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북한의 식량 사정이 최근 10년 사이 가장 심각해 136만t의 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수백만명이 굶주림에 직면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인도적 지원을 논하기 전에 짚어봐야 할 것이 있다. 지원 대상 조건에 부합하느냐다. 전문가들은 특정 국가에 내전 또는 큰 자연재해가 발생하거나 주민들을 먹여 살릴 재원이 없을 때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북한은 세 가지 조건과 거리가 멀다. 미국 국무부에 따르면 북한은 2006~2016년 연평균 33억5000만달러를 국방비로 썼다. 2017~2018년에도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AP통신은 김정은이 최대 30억달러를 핵·미사일 개발에 쓴 것으로 추산했다.

연간 국방비 33억5000만달러로는 베트남 쌀 940만t을 살 수 있다고 한다. 국방비의 7분의 1만 덜 써도 식량난은 간단히 해결된다. 북한 식량난은 재원 부족 탓이 아닌 것이다. 미국 민주주의수호재단의 데이비드 맥스웰 선임연구원은 “김정은이 우선순위를 군사비에서 주민들을 먹이는 것으로 재조정하면 식량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했다.

국가 최고지도자가 재원을 무기 개발에 쏟아붓느라 주민들을 굶주림에 빠뜨린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 행위다. 결과가 예상되는데도 그랬으니 미필적 고의에 해당한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탄핵감이다. 식량난은 김정은이 자초한 참사나 다름없다. 식량을 구걸하면서도 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는 나라가 북한 말고 또 있을까. 로버트 매닝 애틀랜틱카운슬 선임연구원은 “김정은이 핵·미사일 프로그램용으로 많은 자금을 가지고 있으면서 주민들 식량 지원을 세계에 떠넘기는 것은 아이러니”라며 “원조 식량은 김정은이 군사 부문에 자원을 전용하도록 해주는 대체물”이라고 주장했다. 국제사회의 감상적 인도주의가 북한이 핵보유국이 되는 데 일조했다는 의미다.

국제기구의 대북 인도적 지원 사업에 800만달러를 공여하기로 한 우리 정부가 곱씹어 봐야 할 대목이다. 꽉 막힌 북·미 비핵화 협상의 물꼬를 트려는 유화책이겠지만 큰 박수를 받기 어렵다. 미사일 도발에 보상한다는 시각은 남남갈등을 심화시킬 것이다. 북한 매체는 우리의 선의를 “생색내기”라고 폄하하는 마당이다.

식량 지원은 북한 식량난 해결의 근본 대책이 될 수 없다. ‘총알이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사탕알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김정은이 생각을 바꿀 때 북한 식량난 해결의 길은 열릴 것이다. 정부는 핵·미사일이 아닌 민생에 재원을 투입하라고 김정은을 설득해야 한다. 그것은 식량 지원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김환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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