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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실업자·해고자·소방공무원도 노조가입 길 열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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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O 3개 협약’ 내용·전망

경향신문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22일 오전 서울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대선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걸었던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의 비준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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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합법화·공무원 가입 확대…정부, 보충역은 “유지”

경사노위 노사정 대화 9개월간 진척 없자 정부 ‘적극 행보’

노동존중 사회 위해 분위기 전환 시도…국회 논의 등 과제


정부가 28년간 비준을 미뤄온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관련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로 한 것은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비준 절차에 공식 착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정부가 첫발을 뗐을 뿐 국회 상황은 자유한국당 등 야당이 협약 비준을 완강히 반대하고 있어 진통이 예상된다. 그렇지만 집권 2기 ‘노동정책’의 핵심 요소인 만큼 정부 노력 여하에 따라 성패가 좌우될 것으로 전망된다.

■ 누구나 노조에 가입할 권리

한국은 노태우 정부 때인 1991년 ILO에 가입한 이래 핵심협약 비준 절차를 진행했지만 총 8개의 핵심협약 중 4개를 비준하지 못했다. 정부는 22일 결사의 자유 협약인 87·98호, 강제노동 금지 협약인 29호 비준 및 입법 절차를 진행하기로 했다. 노동계 숙원인 결사의 자유 협약은 노동자와 사용자의 자발적인 단체 설립과 가입, 자유로운 대표자 선출과 활동을 보장하는 협약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속한 국가 중 결사의 자유 협약을 하나도 비준하지 않은 국가는 미국과 한국이 유이하다.

헌법은 노동자의 단결권·쟁의권·행동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현행 노동관계법은 자유로운 노동조합 설립 및 가입에 제약을 두고 있다. 예컨대 노조 설립 시 관리감독 기관에 신고하고 허가를 받는 노조설립신고제도는 자유로운 노조 설립을 저해한다. 그뿐만 아니라 현행법은 노조 활동을 할 수 있는 노동자의 범위를 제한하고 있다. 택배기사나 학습지교사처럼 사실상 노동자처럼 일하지만 자영업자로 취급받는 특수고용노동자, 해고자와 실업자, 공무원·교원·소방관은 노조 활동이 제한된다. ILO가 권고하는 결사의 자유에 배치되는 셈이다.

이 같은 현행법으로 인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2013년 노조 지위 상실을 의미하는 ‘법외노조’ 통보가 됐다. 결사의 자유 협약이 비준될 경우 전교조의 합법 노조화 길이 열리는 셈이다. 실업자·해고자와 소방관, 현재는 가입범위가 직급에 따라 제한된 공무원도 노조에 가입할 수 있게 된다.

비자발적인 노동 강요를 금지한 29호 협약은 공익근무요원 제도와 상충된다는 의견도 있다. ILO는 ‘의무 군복무’의 경우 노동 강요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국가가 강제 징집 후 국방의 의무가 아닌 업무를 시키는 공익근무요원 등 대체복무(보충역)는 ‘의무 군복무’와 성격이 다르다는 입장이다. 정부는 보충역 제도가 협약에 전면 배치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고, 제도개선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 ‘합의’ 실패…정부 의지가 관건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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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그간 ILO 협약 비준 절차에 있어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통한 노사 간의 사회적 대화가 우선이라는 입장을 취해왔다. 하지만 경사노위를 통한 노사정 대화는 지난해 7월부터 40여차례 열렸음에도 이렇다 할 진전을 보지 못했다. 현행 노동관계법을 통해 노사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경영계는 ‘파업 시 대체근로 투입’ ‘부당노동행위 사용자 처벌 조항 폐지’ 등을 요구하며 사실상 합의 무산 작전에 돌입했다. 노동계는 노동계대로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 사항을 노사 합의로 진행해야 하느냐”며 원론적 입장을 고수했다. “협약을 먼저 비준하고 입법 절차를 마무리하라”는 노동계의 선 비준 요구와 “정부가 적극적 역할을 해달라”는 경사노위 공익위원의 요구에도 정부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정부가 결단을 내릴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정부가 사회적 대화에 책임을 미루다 비준의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것이다. ILO 협약 비준 논의에 참여했던 경사노위 관계자는 “정부가 집권 초반에 동력이 있을 때 밀어붙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지금보다는 국회 동의를 받기 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1년에 가까운 논의 기간 동안 정부의 개혁 동력은 낮아졌고, 경사노위는 탄력근로제 등 변수를 만나면서 일이 꼬였다는 것이다.

이날 정부가 돌연 비준동의안 제출이라는 돌파구를 선택한 배경에는 ‘결국 정부가 성패를 좌우한다’는 현실론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최저임금 속도조절론’ 등으로 ‘노동존중 사회’가 빛이 바래는 상황에서 터닝포인트 마련이 필요했다는 분석도 있다.

정부의 비준동의안 제출은 그야말로 시작에 불과하다.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한 야당이 완강히 반대하는 상황이다. 입법안을 집중 논의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김학용 위원장(자유한국당)은 이날 “노사가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혔음에도 정부가 무리수를 두는 것은 사안을 더 어렵게 만들 뿐”이라며 “평지풍파 일으키지 말라”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환노위 간사인 한정애 의원도 “그때까지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하는데 현재 분위기는 녹록지 않다”고 말했다. 국회 논의 과정에서 핵심협약의 취지가 무색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정부가 비준안을 제출하게 되면 공은 국회로 넘어가지만 사실상 정부의 노력 여하에 성패가 달렸다는 분석도 많다. 한국에 대한 유럽연합(EU)의 ILO 핵심협약 비준 요구가 통상 마찰로 비화할 수 있는 상황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EU는 한국이 한·EU 자유무역협정(FTA) 제13장(무역과 지속가능발전 장)에 규정된 ILO 핵심협약 비준 노력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며 작년 12월 FTA 사상 최초로 분쟁 해결 절차 첫 단계인 정부 간 협의를 요청했다. 이재갑 장관은 “지난달 15일 발표된 경사노위 최종 공익위원안을 포함해 사회 각계각층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여 합리적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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