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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문화와 삶]그럼에도 나는 왜 야구를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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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갔다. TV에서는 저녁 일일 드라마가 방영 중이었다. 보려고 보는 건 아닌데도 잠깐잠깐 눈을 돌릴 때마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볼 때마다 ‘막장’의 요소가 기다렸다는 듯 나왔기 때문이다. 회상장면에서 스카프를 두른 여인이 아이를 잘사는 집 앞에 놓는다든가, 세월이 흐른 후 그 여인의 시어머니가 졸도한다든가, 그 여인과 또 다른 여인이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싸우고 있다든가 하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보려고 보는 게 아니었다.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온통 그랬다. 평소 드라마를 보지 않기에 말로만 들었던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가 무엇인지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왜 욕하면서 시간을 소비하는가, 직관적으론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조금 생각해보니 남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도 야구를 그렇게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경향신문

약속이 없는 날 저녁 6시반이 되면 나는 반사적으로 TV를 켠다. 그리고 3~4시간을 오직 야구를 보는 데 쓴다. 내가 응원하는 팀은 다행히 리그 상위권에 있어서 지는 날보다 이기는 날이 많지만 그렇다해도 저녁 내내 기분이 좋은 건 아니다. 어처구니없는 실책이 나온다든가, 주자를 잔뜩 쌓아놓고 올라온 타자가 병살타로 이닝을 종료시킨다든가 하면 어김없이 욕이 튀어나온다. 무엇보다 가장 화나는 상황은 순탄하게 잘 흘러가던 시합이 막판에 뒤집힐 때다. 그것도 상대방이 잘해서가 아니라 우리 선수의 어이없는 플레이로 분위기를 헌납할 때는 평소 잘 쓰지 않던 극단적인 표현이 혀끝에서 맴돈다. 팀이 이기고 있을 때 나오는 필승조 투수들을 모두 올린 상황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시합이 끝난 후에도 ‘오늘의 역적’을 원망하게 된다. 감정 동요 없이 볼 수 있는 시합은 1회부터 9회까지 모두가 무난하게 잘해서 쉽게 승기를 잡거나 반대로 초장부터 경기가 터져 나가서 기대가 힘든 경우밖에 없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시합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사람들이 꽤나 많은 것 같다. 이런저런 야구 커뮤니티마다 그날 부진했던 선수를 능지처참할 기세로 달려들고, 이해할 수 없는 운용을 한 감독의 부모 안부를 묻는 일이 일상이다. 잘하건 못하건 모든 감독들의 성이 강제로 ‘돌’로 바뀌는 일은 프로야구 감독이라면 마땅히 감수해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늘 하위권에 있는 팀의 팬들은 제발 해체하라고 울부짖는다. 일희일비야말로 스포츠 열혈팬들의 공통점이라지만 일주일에 여섯번 시합을 하는 야구의 특성상 일희일비의 정도도 심하다. 모든 순간들이 점으로 연결되는 까닭에 모든 플레이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시간제한도 없으니 고통의 시간도 길다. 분노의 레저다. 이렇게 쓰고 보니 차라리 막장 드라마가 나은 것 같다. 어쨌든 그런 드라마는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이쯤 되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스포츠를 본다는 말이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 시간에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는 게 백배 천배 나을 텐데.

그럼에도 우리는 왜 야구를, 스포츠를 보는 것일까. 영국의 작가이자 프리미어리그 아스널의 열혈 팬인 닉 혼비는 그의 데뷔작 <피버 피치>에서 이렇게 썼다. “축구는 또 하나의 우주로서, 노동과 마찬가지로 심각하고 스트레스가 심한 것이며, 염려와 희망과 실망을, 그리고 이따금씩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내가 축구를 보러 가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지만, 적어도 오락을 위해서 가는 것은 아니다. 토요일 오후 주위에 모여 앉은 침울한 얼굴들을 보면, 남들도 나와 같은 기분임을 알 수 있다. 충성스러운 축구팬에게, 보기 즐거운 축구의 존재는 정글 한가운데서 쓰러지는 나무의 존재와 같다. 우리는 그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언제 어떻게 왜 쓰러지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입장은 아닌 것이다.” 패배한 경기의 허탈함, 이긴 경기 안에서의 실책으로 인한 분노 등을 걷어내고 복기하자면 한 경기 한 경기가 인생과 같다. 삶에서의 어이없던 실수를 대입해보고, 승부가 필요했던 때 과감하지 못했던 자신을 돌이켜 보게 된다. 그러니 모든 스포츠 팬들이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종목을 인생이라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냥 좋기만 한 인생이 없듯, 마냥 좋기만 한 경기도 없으니. 승부를 예상할 수 없기에, 나는 저녁에 TV를 켠다. 야구장을 찾는다. 하루하루를 살아나간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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