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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70년만에 돌려본 영사기…리얼리즘 거장은 ‘친일 감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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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CJ문화재단 공동기획

② 조선영화 속 친일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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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한국영화의 역사 속에서 100편의 영화를 선정하는 일은 여러 질문을 낳는다. 단적으로 ‘한국영화는 무엇인가’의 개념과 성격, 그 범위 규정의 문제가 그러하고, 어떤 영화를 정전화하고 어떤 감독을 옹호해 역사화할 것인가도 그러하다. 그중 1919년 이후 한국영화의 발아와 정착이 식민지 시기에 이루어졌는데, 특히 일제강점기 말 제작된 친일영화를 한국영화사에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는 여전히 다각도로 연구가 진행 중이다. 그런 가운데 통상 식민지 시기 한국인이 제작한 영화를 ‘조선영화’라 하고, 그중 일제 말기를 중심으로 협력과 어용의 혐의가 규명된 한국인 감독이 제작한 군국주의 영화를 ‘친일영화’로 칭한다. 이들 중 몇 편이 이번 1차 선정에 포함되면서 친일영화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 결과 최종 선정에서 친일영화인이 제작한 친일영화는 한국영화의 100년을 조명하는 이번의 기획에서는 제외되었다. 친일영화가 한국영화의 고전이나 민족영화의 정전의 범위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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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기 민족영화 정전을 꼽히는

최인규 40년대 작품 최근 발굴돼

틀어보니 일제 ‘소국민 담론’ 전파

식민지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물론 한국영화사적으로도 ‘역사의 암흑기’였다. 게다가 해방 이전 제작된 157편의 극영화 중 10% 미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라 해당 시기의 영화계를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던 중 2005년 이후 한국영상자료원이 식민지 시기 영화를 연달아 발굴 공개해, 2차 문헌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던 작품의 실체를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수업료>(1940), <집 없는 천사>(1941) 같은 최인규의 영화는 고 이영일 평론가가 저술한 한국영화연구서 <한국영화전사>(1969)를 통해 <아리랑>(1926)을 비롯한 나운규의 작품 그리고 해방 후 유현목의 <오발탄>(1961)을 잇는, ‘리얼리즘’을 그 핵심에 둔 ‘민족영화의 전통과 미학’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영화애호가와 연구자들은 <집 없는 천사>(2005년 공개)를 거쳐 <수업료>(2014년 공개)까지 최인규의 영화를 직접 대면하면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리얼리즘 영화의 걸작으로 또 암흑기 한국영화의 역사적 속성을 담보해주는 정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그의 영화가 친일영화의 내적 논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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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친일영화 ‘군용열차’부터

해방 직전의 ‘사랑의 맹세’까지

내선일체·자살특공대 선전 포함

식민지배 논리 극단적 서사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가 본격적인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서면서 조선영화는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일제는 1939년 조선영화인협회를 결성해 영화인등록제를 강제했고, 조선영화령을 공포한 뒤 강력한 검열을 실시했다. 1942년에는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이후 조영)를 설립해 조선의 모든 영화사를 통폐합했다. 이로써 실질적으로 민간 영화사의 조선영화 제작이 불가능하게 되면서 1945년 8월까지 본격적인 의미의 친일영화가 제작되었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필름을 확인할 수 있는 친일영화들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자.

최초의 친일영화로 알려진 것은 서광제의 <군용열차>(1938)이다. 중일전쟁을 배경으로 한 신파 양식으로 두 기관사의 사랑과 반도의 철도를 지키려는 신민의식이 드러나 있다. 아동을 주인공으로 하고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영화 <수업료>(최인규)는 일제의 ‘소국민 담론’의 논리를 서사화했고, 방수원의 고아원 향린원을 소재로 한 <집 없는 천사>(최인규)에서는 ‘천황제의 가족주의’를 노골적으로 전시했다. <지원병>(안석영, 1941)에서는 지원병이 되어 내선일체를 실현해 진정한 국민으로 거듭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영화에 대한 영화 <반도의 봄>(이병일, 1941)은 조선영화령을 발표한 뒤 총독부에 의한 영화의 기업화를 선전하고 있다. 필름의 일부가 남아 있는 <그대와 나>(허영, 1941)는 조선인 지원병 중 최초로 죽음을 맞이한 이인석을 위인화한 영화이다. 1942년 이후 통합된 조영이 만드는 영화는 군국주의의 이념을 효과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국가가족주의의 가치를 중심에 둔 영화로 일본어로 제작했다. 1942년 징병제가 실시된 뒤 공개된 <조선해협>(박기채, 1943)의 주인공은 형의 전사 소식을 듣고 자신도 지원병에 입대한다. 물론 그를 사랑하는 여인도 총후부인과 군국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착실히 해낸다. <병정님>(방한준, 1944) 역시 조선인 지원병 지원을 정당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해방 직전 완성된 <사랑의 맹세>(최인규·이마이 다다시, 1945)는 자살특공대를 선전하는 극단적 친일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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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사 속 친일영화 좌표 등

조선영화 전체성 논의 최근 활발

식민지 시기 영화의 발굴과 함께 지난 10여년간 친일영화와 친일영화인에 대한 논의가 재점화되고 연구가 축적되었다. 그 과정에서 식민지 시기 전체를 그 시간적 범위로 하고 ‘군국주의, 파시즘, 어용, 협력, 합작, 국책, 선전’ 등의 용어가 범람하는 가운데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거나 그들의 정책(내선일체의 황국신민화)에 동조하고 이를 선전·선동하는 영화를 ‘친일영화’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에 동조해 반민족적인 태도와 행위로 친일영화를 만드는 데에 중추적인 구실을 한 한국인들을 ‘친일영화인’으로 분류했다. 친일영화들의 내적 논리를 다각도로 밝히는 가운데, 이들 영화가 가진 ‘균열’ 또는 ‘징후’로 이 작품들을 조선영화의 정체성 안에 연구하려는 적극적인 시도들도 있다. 친일영화가 주입하는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식민지 관객들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분노와 비애를 통해 저항적으로 수용했다는 논의, 상호작용하는 제국과 식민지의 관계 속에서 친일 혹은 반일, 협력 혹은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인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문화적 역동성이 조선영화에 새겨지고 있으며 친일영화인 역시 이중적인 의식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 그러하다. 친일의 메시지가 미미하고, 영화적 완성도가 높으며 조선의 특수성이 반영되어 민족적 리얼리즘의 미학을 잘 드러낸다고 평가받아온 몇몇 영화들은 ‘친일영화’의 범주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논의는 여전히 존재한다.

심혜경 영화연구자·중앙대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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