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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성과 지루함의 땅에 머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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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언제나 생경한 풍경으로 관객을 인도하는 배우 틸다 스윈턴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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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영어로 뭐지?”

최근 한국의 한 광고에 등장한 배우 틸다 스윈턴은 이렇게 묻는다. 사실 영어를 몰라도 답을 몰라도 상관없다. 핵심은 저토록 위풍당당한 존재와 함께라면 지구 반대편이든 지구 바깥이든 어디로든 당장 떠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다. 그리고 그 여정이 절대로 지루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다.

누군가에겐 웃기고 상상력 풍부한 바이럴 시리즈, 누군가에겐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2013)와 <옥자>(2017)로 한국 관객에게 익숙해진 외국 배우를 영리하게 기용한 상업광고 정도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틸다 스윈턴이라는 배우가 거쳐온 삶과 작품의 궤적을 오랜 시간 지켜본 관객에게 이 광고는 한 배우의 핵심을 제대로 간파한 사려 깊은 ‘스토리텔링’이다.

새 세상을 찾아 떠나는 개척자이자 여행자



틸다 스윈턴은 규모와 국경에 상관없이 이어진 자신의 필모그래피 속에서 언제나 본 적 없는 생경한 풍경으로 관객을 인도한 배우였고 그 여정을 통해 더없는 신뢰를 쌓아온 미스터리한 안내자였다. 또한 자신도 관성과 지루함의 땅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세상을 찾아 떠나는 개척자이자 여행자이기도 했다.

틸다 스윈턴이 최근에 당도한 목적지는 죽은 나치의 망령들과 살아 있는 극좌파 바더 마인호프(적군파)의 테러가 뒤엉켜 부글거리는 1977년 독일이다. 5월16일 개봉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 <서스페리아>는 그 시절 독일 베를린의 한가운데 있는 어느 무용학교의 비밀스럽고 거대한 문으로 들어간다. 이탈리아 공포영화의 거장 다리오 아르젠토의 동명의 1977년도 영화를 리메이크한 <서스페리아>는 마녀들이 운영하는 무용학교에 들어간 미국 여성 무용수 수지에게 벌어지는 기괴한 이야기를 따라간다.

이 영화에서 스윈턴은 무용단의 수석 안무가 마담 블랑, 남성 정신분석학자 클렘페러 박사 그리고 영화 후반부 하이라이트에 얼굴을 드러내는 무용단의 창립자 헬레나 마르코스까지 무려 1인 3역을 연기한다. 특히 클렘페러 박사 역은 가상의 남성 배우 이름을 만들어서 비밀에 부쳤을 정도로 반전의 캐스팅이었고, 사실 영화를 보면서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 않다.

이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84살 노부인 마담 D를 연기했던 경험이 있지만, 이번엔 얼굴과 몸의 특수분장뿐 아니라 다리 사이에 특수 제작한 가짜 성기를 차고 남성인 클렘페러 박사를 연기했다. 또한 단순히 분장의 힘을 넘어 집요한 학자의 날카로움 속에 여든이 넘은 노인의 느린 움직임과 평생 몸에 밴 남성적 태도까지 구현해내며 예술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새로운 성취를 일구어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초자아, 자아, 이드(프로이트가 정의한 인간 심리의 세 가지 요소)를 동시에 연기할 배우는 틸다 스윈턴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실로 영화는 마담 블랑의 클로즈업 다음에 바로 클렘페러 박사의 클로즈업을 배치하고, 마담 블랑의 목소리에 클렘페러 박사의 목소리를 이어 붙이고, 심지어 한 공간에 3명의 캐릭터가 동시에 존재하게 하는 등 과감한 편집과 연출로 한 배우가 연기하는 다중의 캐릭터에 대한 의심에 정면승부로 응답한다.

여자이기도 남자이기도, 신이기도 마녀이기도, 어제를 살기도 오늘을 살기도 하는 존재는 누구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같은 이 질문에 부합하는 배우는 단연 틸다 스윈턴이다. 스윈턴은 1960년 지구에 태어난 여성으로 살아가지만, 단순히 ‘중년 인간 여성’이라는 구분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영화 <올란도>(1992)는 “그의 성별에 대한 의심은 없었다”라는 내레이션으로 문을 연다. 그리고 영화의 카메라는 17세기 회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미소년의 모습으로 응시하는 스윈턴의 얼굴을 탐미적으로 바라본다. 400년에 걸쳐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모하며 초월적인 삶을 살았던 ‘올란도’는 스윈턴을 기억하는 대표적인 캐릭터가 된 동시에, “변하지 말고, 병들지 말고, 늙지도 말아야 한다”는 <올란도> 속 엘리자베스 1세의 대사는 스윈턴에게 지금까지도 유효한 주문으로 자리잡고 있다.

“영화는 함께 만드는 사람들과 관계에서 성장”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2013)에서 뱀파이어 커플을 연기한 배우 톰 히들스턴과는 무려 21살 차이가 나지만 두 사람은 어떤 위화감도 없이 어우러진다. 바이런과 슈베르트, 셰익스피어와 친구 하며 몇 세기를 거쳐 살아온 뱀파이어의 생을 생각하면 어제와 오늘 정도의 차이다.

틸다 스윈턴은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고 스코틀랜드 혈통에 현재 스코틀랜드 북부에서 살고 있지만, 그의 이름 앞에 ‘영국 배우’ ‘스코틀랜드 배우’라고 특정 국가, 인종, 지역 코드를 달기엔 어쩐지 충분치 않다. <아이 엠 러브>(2009)에서는 이탈리아에 사는 러시아 출신 여성의 악센트를 쓰고, <서스페리아>에서는 독일어와 프랑스어, 심지어 광고에서는 떡볶이를 먹으며 한국어로 소통하려고 애쓴다.

<콘스탄틴>(2005)의 천사 가브리엘,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2005~2010)의 하얀 마녀,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의 뱀파이어처럼 아예 인간 세계의 구분을 뛰어넘는 존재도 많다. <닥터 스트레인지>(2016)의 스승 ‘에이션트 원’은 원작 만화에서는 티베트 남성 노승이었다. 이 캐릭터를 백인 여성인 스윈턴이 맡았을 때는 잠시 ‘화이트 워싱’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스윈턴은 영화 속 에이션트 원을 인간 세계의 모든 구분을 초월하는 새로운 캐릭터로 재창조해버렸다.

영국 상류층에서 자라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했고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에서 무대생활을 시작했지만 <아이 엠 러브>에서 명품 옷을 입은 이탈리아 대부호의 며느리는 스윈턴의 캐릭터 선택에서 이례적인 경우다. 스윈턴의 영화적 페르소나(인격)는 성별과 인종, 나이, 국적, 뿌리, 계층, 교육 수준 그리고 시대와 차원까지 국경 없이 경계 없이 자유롭게 넘나든다.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더그 에이킨과 한 인터뷰(18명의 예술인에게 창조성의 근원을 묻는 2012년 영국 전시관 ‘테이트 리버풀’의 전시 작품 ‘소스’(Source))에서 스윈턴은 자신을 계속해서 배우로 살게 하는 힘의 근원을 “과연 정체성이란 것이 정말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심”과 “정체성에 대한 사회의 강박관념에 대한 관심”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함께 만드는 사람들과 관계에서 성장한다”고 믿는 스윈턴은 데뷔작 <카라바지오>(1986)부터 <대영제국의 몰락>(1987) 등 총 8편의 영화를 함께했던 급진파 예술가 데릭 저먼을 비롯해서 짐 자머시, 웨스 앤더슨, 테리 길리엄, 코엔 형제, 린 램지, 루카 구아다니노 그리고 봉준호까지 ‘작가 감독’들을 강력하게 자극하는 ‘작가 배우’다.

그 동료들에 대한 틸다 스윈턴의 인터뷰를 유심히 살펴보면 유독 “쌍둥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설국열차> <옥자>를 함께한 봉준호 감독에 대해서는 “나와 전생에 쌍둥이가 아니었을까”라며 그와의 친밀감과 동질감을 표현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존 버거의 사계>(2016)에서 동료로 친구로 우정을 쌓은 작가 존 버거에 대해서는 ‘정신적 쌍둥이’라고 말한다.

그 누구와도 같지 않은 “자체의 형상”



실제 존 버거와 틸다 스윈턴은 1926년과 1960년, 34년 간격으로 런던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은 저항의 상징인 ‘가이 포크스 데이’(11월5일)가 생일이라는 태생적 저항성과 규율과 명령으로 다져진 군인의 자녀라는 정서적 공감대까지 나누었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정체성에 가둬지지 않는 스윈턴의 얼굴은 존 버거의 말대로 어느덧 그 누구와도 같지 않은 “자체의 형상을 띠게” 되었다.

그렇게 쌍둥이 같은 동료들과 손잡고 누구와도 닮지 않았지만 자신과는 똑 닮은 페르소나들을 하나둘 세상으로 내보내는 중이다. 가끔은 <옥자>나 <헤일, 시저!>처럼 두 명을 동시에, <서스페리아>처럼 세쌍둥이를 한 번에 생산하기도 한다. 우연히도 필연적으로, 스윈턴은 실제 삶에서도 남녀 이란성쌍둥이의 엄마다.

이 배우의 비트

영화 <설국열차>,

메이슨 총리의 틀니 결정적 한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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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나는 살고 싶으니까!”

이 인간의 목표는 명료하다. 결국은 생존이다.

절대 권력자 윌포드의 충실한 대리인이자 충성스러운 심복 메이슨 총리(틸다 스윈턴). 그녀는 “나는 애초부터 앞 칸, 너희들은 꼬리 칸! 제자리를 지켜!”라고 협박하며 ‘설국열차’라는 소우주의 기만적 균형과 표면적 평화를 유지해온 권력 서열 2인자다.

메이슨 총리는 캐스팅 초기에는 중년 남성 캐릭터였다. 하지만 배우 틸다 스윈턴의 합류와 함께 여성으로 바뀌었고 스윈턴은 메이슨을 “공감보다는 희화화한 지도자”로 구축하기 위해 최대한 우스꽝스러운 외양으로 채워나갔다. 스윈턴의 스코틀랜드 집을 방문한 봉준호 감독과 집 안에 있는 이런저런 소품들을 가지고 놀다가 발견했다는 얼굴의 반을 덮는 큰 안경을 비롯해 앞머리를 핀으로 가지런히 모아 붙인 단발머리, 들창코 분장 등은 메이슨의 기괴함과 우스꽝스러움을 배가한다. 무엇보다 영국에서 특수 제작한 틀니는 이 캐릭터의 완성을 돕는 결정적인 한 방이다.

꼬리 칸 사람들이 닫힌 문을 하나하나 열어젖히며 점점 앞 칸을 향해 돌진해 들어오는 과정에서 메이슨은 꼼짝없이 인질로 잡힌다. 두 팔이 쇠사슬 수갑에 묶여 길리엄(존 하트)부터 커티스(크리스 에번스)까지 꼬리 칸 생존자들과 하나하나 대적하듯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2분40초의 비트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메이슨의 다채로운 모색의 향연이다. 스윈턴은 뻔뻔함과 비굴함, 기괴함과 사악함, 넉살과 천진함 사이의 기어를 재빠르게 바꿔가며 순간적으로 방향을 뒤집고 커브를 틀면서 생존을 위한 절실하고 아찔한 운전을 선보인다. “엔진은 성스럽고 윌포드님은 위대하셔. 게다가 자비로우시지.” 윌포드를 향한 발악에 가까운 찬양과 충성심은 목 앞으로 날아온 시퍼런 칼날 앞에서 빠르게 자취를 감춘다. 벌벌 떨다가 곧바로 협상 모드로 돌변한 메이슨은 “머리 칸으로 너희들을 안내할 테니 꼭 윌포드를 죽여. 그래야 내가 산다”라고 서늘한 목소리로 제안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커티스 앞에서 틀니를 빼는 기괴한 행동을 통해 완전한 투항을 선언한다. “커티스?” 잇몸만 남아 합죽해진 입매로, 메이슨은 자신이 던진 최후의 제안이 승낙받기를 마치 사탕을 갈구하는 아이 같은 표정으로 바라본다. 치아부터 마음까지, 어느 하나 진짜도 자신의 것도 아니었던 메이슨은 그렇게 모든 걸 빼버린 상태로 돌아가 기어코 살아남는다. 물론 아주 잠시지만 말이다.

*비트란 연기 행동(action)의 최소 단위다. 배우의 성취를 집중 조명하는 이 연재에서는 연출과 카메라, 편집의 개념인 숏(shot) 혹은 신(scene) 대신 ‘비트’를 사용한다.



백은하 배우연구소(@ una_labo)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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