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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여성칼럼] 아직 갈길 먼 의료계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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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피부과, 안과, 성형외과, 정형외과는 인턴 의사들 사이에서 선택하고 싶은 전공 과목으로 인기가 있다. 물론 인기는 보건ㆍ의료 정책에 따라 '사회적 몸값'과 연동돼 수시로 변하지만 2000년대 이후 변하지 않는 부동의 인기 과들이다.


지난해 11~12월 두 달간 설문조사가 진행됐다. 남녀 의사를 대상으로 처음 시도된 설문조사의 내용은 바로 '의료계의 성평등'에 대한 것이었다. '원하는 전문 과목의 의사가 되고, 원하는 병원에 취직ㆍ승진하기 위해 공부하고, 환자를 열심히 보는 것 외에도 어떤 요소가 진로에 영향을 줄까'라는 질문이 포함됐는데 '성별'이라는 답이 다수 나왔다. 수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부동의 인기 과들, 이에 대한 성차별의 제보가 설문조사를 통해 쏟아진 것이다.


'성적이 낮아도 남성을 뽑아요. 관행이 그런 걸 알기 때문에 일부러 지원 못 한 여성들이 많아요' '특정 과에서 여성을 뽑지 않겠다고 말하거나 여성밖에 지원자가 없는데도 여성을 뽑진 않겠다고 했어요' '과장님이 남성 지원자를 선호하고 비슷한 스펙의 경우 남성을 뽑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에요' '남성을 우선 선발하기 위해 남성 T/O를 사전에 정해놓고 뽑아요' '여자는 3년에 한 번, 한 명만 뽑는다고 말하는 과가 있어요' '성적순으로 하면 합격자가 모두 여자가 될 것 같으니 남자를 끼워넣는 일이 있다고 들었어요' 등이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전문의가 돼가는 과정에서 남녀 의사 모두 이런 의료계의 관행에 그동안 순응해왔다. 문제를 문제라 인식하지 못했고, 그래서 개선돼야 한다고 사회에 소리치지 못했다.


의과대학 교수 임용 과정에서도 비슷한 경험에 직면하게 된다. '논문 실적과 무관하게 아예 남성을 데려가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실제로 세부 전공과 상관없이 남성이 발령됐어요' '같은 조건이라면 여성을 선호하지 않는다며 교수로 임용되려면 남성들보다 많은 논문 등 뛰어난 실적을 보여줘야 한다고 했어요' '우리 병원에 여성 교수는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된다고 말하는 교수도 있었어요' 등이다. 이렇게 여의사들의 꿈은 현실 앞에서 점점 무기력해지곤 했다.


대한민국의 의사 4명 중 1명은 여성이다. 1980년대 이후 전체 의사 중 여의사 비율이 2배로 증가했다. 앞으로도 여의사 비율이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여성이 의국과 교실에 들어오면 결혼, 임신, 출산으로 주변 구성원들이 업무를 떠안게 된다. 그래서 임신한 여성은 임신을 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다. 여성이 많은 조직일수록 이 상황은 더 악화된다. 24시간 당직을 서야 하고 환자의 생명이 좌우되는 중증 환자를 돌보는 과라면 그 상황은 더 심각하다. 의료사고가 사회의 첨예한 이슈가 되는 요즘 세상에 안전한 진료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과로나 '몰빵'과 같은 업무 환경은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저출산 문제-열악한 임신 근로 환경-의료계 성차별'의 문제는 악순환으로 반복된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건드려야 할지 난감하다. 임신 전공의 주당 40시간 근무 문제도 방치돼 있다.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의료계의 현실이 모든 병원과 모든 과에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의료계에서 여성이 차별받는 이유가 임신ㆍ출산의 문제만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의료계 내에서의 전공의 선발, 교수 임용, 승진,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공정성과 투명성은 앞으로 해결돼야 할 과제다. 보수적인 남성 중심의 집단이라고, 생명을 다루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는 변화하는 사회에서 통용되기 어렵다. 의료계의 잘못된 관행을 타파하기 위해 정부와 의료계가 머리를 맞대어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신현영 한양대학교 명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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