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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다름이 함께 있음이다”… 2019년의 헤겔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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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억울한 철학자다. 명성에 비해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그 탓에 숱한 오해도 받았다. 학계에서 헤겔을 재조명하는 흐름이 반향을 얻는 것은 그 때문이다. 글항아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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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서양철학의 완성자인 독일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1770~1831). 그 어려운 이름이 요즘 학술 출판계의 ‘대세’다. 올해 들어 한 달에 한 권 꼴로 헤겔 관련 책이 나오고 있는 것. ‘헤겔의 이성, 국가, 역사’(도서출판 b) ‘헤겔’(교유서가) ‘다시 헤겔을 읽다’(곰출판) ‘정신현상학 강독’ 시리즈(글항아리) ‘헤겔과 그 적들’(사월의 책) 등이다. 한 출판사 편집자는 “별다른 계기도 없는데 특정 철학자에 대해 이렇게 책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평했다.

사후 188년인 올해 헤겔이 국내에서 조명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헤겔 관련 책을 낸 국내 저자들을 비롯한 헤겔 연구 권위자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돌아온 답은 이랬다. “헤겔은 익숙한 이름이지만, 우리는 헤겔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헤겔을 뒤늦게 알아 가는 과정이다.” ‘정신현상학 강독’ 시리즈의 저자인 재야 철학자 전대호씨는 “우리는 헤겔을 알고 있다고 여겼지만, 잘 몰랐다. 들뢰즈를 비롯한 후대 철학자들에게도 헤겔은 넘고 싶지만 넘을 수 없는 큰 산이었다”고 말했다.

헤겔은 ‘법철학’ ‘논리학’ ‘정신현상학’ 등의 저서를 통해 국가, 공동체, 시민사회 등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개념을 던지며 시대를 앞서 조망했다. 그러나 대중에게 알려진 헤겔의 철학은 관념론을 대표하는 변증법 정도다. 헤겔은 그 막연한 명성 때문에 숱한 오해와 공격에 시달렸다. 그가 주창한 동일성의 개념을 전체주의로 낙인 찍은 게 발단이었다. 칼 포퍼는 헤겔을 인종주의와 전체주의를 대변하는 열린 사회의 적들이라고 비판했으며, 탈현대 철학자들은 헤겔을 난도질했다.

한국에서도 헤겔은 그다지 대접받지 못했다. 정치적으로, 또는 시대의 입맛에 맞게 해석된 탓이다. 일제시대에 처음 국내에 소개된 헤겔 철학은 국가주의의 표상으로 인식됐다. 1960년대엔 헤겔 철학의 대가이자 한국헤겔학회 창립자인 고(故) 임석진 명지대 교수의 사단이 헤겔 연구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이론의 틀을 잡는데 집중해 헤겔 사상의 실질적 내용은 충분히 파고들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때문에 헤겔은 궤변만 늘어 놓는 ‘도인’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1980년대에 헤겔은 그의 변증법을 끌어다 쓴 마르크스를 이해하는 데 부차적으로 동원되는 이름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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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1월부터 한 달에 한번 꼴로 출간됐던 헤겔 관련 저서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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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을 되살린 것은 역설적이게도 헤겔과 대척점에 서 있던 영미권의 현대 분석철학자들이었다. 한국헤겔학회 회장을 지낸 강순전 명지대 교수는 “1990년대 분석철학자들이 현대철학이 봉착해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헤겔에서 단서를 찾기 시작한 게 헤겔 르네상스의 시초”라고 말했다. 박병기 전 전남대 교수는 “신 실용주의 틀로 헤겔을 해석하자 실천철학자로서의 헤겔의 새로운 면모가 드러난 것이 그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헤겔 다시 보기’의 흐름이 한국에 당도해 본격적인 연구와 출간이 이뤄진 것은 2007년부터이고, 한국헤겔학회가 지난해 개최한 헤겔과 영미철학 토론이 불을 붙였다.

새롭게 발견된 헤겔의 메시지는 지금 시대에도 유효하다. ‘법철학’에 드러난 국가의 역할과 공동체에 관한 헤겔의 생각이 특히 그렇다. ‘헤겔과 그 적들’을 쓴 남기호 연세대 교수는 “헤겔이 표방한 국가상은 전체주의가 아닌 ‘인륜적 국가’”라고 설명한다. 인륜적 국가는 개인이 각자의 자유와 의지를 누리며 스스로 개선해 나가는 공동체를 뜻하는 개념이다. 헤겔은 보편의 인륜을 저버리고 경제적 사익 추구에 매몰되는 주체가 공동체의 위기를 일으킨다고 봤다. 남 교수는 “헤겔의 공동체 개념은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진단하는 담론으로 유용하다”고 말했다.

헤겔은 타자를 혐오하는 분열의 시대를 치유할 방책도 제시한다. 요약하자면 ‘차이를 인정하는 것을 통한 연대’다. 한국헤겔학회 회장인 이광모 숙명여대 교수는 “최근 한국 사회의 분열은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 비롯됐다”며 “헤겔은 그 해결책으로 ‘상호 인정’을 주문했다”고 말했다. 전대호씨 역시 “헤겔은 보편주의를 지향하는 다원주의자며 “‘다름이 함께 있음’은 헤겔 철학을 관통하는 메시지”라고 설명했다.

국내외의 ‘헤겔 르네상스’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다음 달엔 독일 정통 헤겔주의 철학자인 클라우스 피베크가 헤겔 법철학을 자유의 관점에서 분석한 ‘자유란 무엇인가: 헤겔 법철학과 현대’(길)이 정대성 연세대 교수의 번역본으로 나온다. 한국헤겔학회는 오는 10월 헤겔 미학을 주제 삼은 학술대회를 연다.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가 대표하는 이원론적 철학을 종합하는 위치에 있는 게 헤겔”이라며 “헤겔을 우회한 채 시대의 철학을 논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