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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기자의 시각] 잘되면 靑, 안되면 部處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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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안준용 정치부 기자


요즘 젊은 외교관들을 만나면 꼭 듣는 말이 있다. 수위는 제각각이지만 '청와대가 해도 너무한다'는 것이다. "잘되는 일은 모두 청와대 덕, 안 풀리는 일은 다 외교부 탓이 되는 게 신기하다"고도 한다.

지난 16일 리비아에서 납치된 우리 국민이 315일 만에 풀려나자 청와대는 외교부가 발표하는 관례를 깨고 직접 나섰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아랍에미리트(UAE) 왕세제에게 특별히 부탁했다. UAE 지원이 결정적이었다"고 했다. 외교부 담당 직원들은 지난 10개월간 전화기를 붙든 채 구출 업무에 매달렸다. '왜 이리 구출이 더디냐'는 비판도 수시로 받았다. 그런데 막판에 생색은 청와대가 냈다. 발표 관례를 깼다는 논란이 일자 청와대는 "대통령이 수시로 보고받으며 직접 챙겨온 사안이고, 국민 생명에 관한 중요한 일이라 안보실장이 발표한 것"이라고 했다.

이에 관가에선 "우리 국민이 구출되지 못하고 잘못됐어도 청와대가 발표했겠느냐"는 얘기가 나왔다. '국민 생명이 최우선'이라는 청와대는 작년 7월 마린온 추락 사고로 장병 5명이 순직했을 때 영결식 직전까지 일주일간 조문 인사도 파견하지 않았다. 작년 3월 가나에서 국민 3명이 납치됐을 땐 선원 소재도 모른 채 문 대통령의 청해부대 급파 지시를 공개해 논란이 됐다.

청와대는 그간 껄끄러운 일은 부처에 떠넘겨왔다. 최근엔 일왕 퇴위·즉위에 맞춰 서한을 보내면서 이 사실을 외교부 브리핑·보도자료를 통해 공개했다. 청와대 공식 문서에 '천황'이란 표현을 담기 싫었던 것이다. 작년 11월엔 문 대통령이 체코 총리와 면담한다고 했다가 '왜 정상회담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자 "회담이 맞는데, 실무자의 오기(誤記)"라고 했다. 외교부 탓으로 돌렸는데, 알고 보니 체코 측이 비공식 면담을 요청한 것이었다. 외교부는 당시 대통령 체코 방문의 각종 논란을 해명하는 2000자 넘는 문자메시지도 뿌렸다. 내부에선 '청와대 뒤치다꺼리 부처가 됐다'는 자조도 나왔다. 청와대는 책임을 떠넘기면서도 민감한 언론 보도가 나오면 매번 외교부 직원들의 통화 내역을 무더기로 조사했다.

물론 외교부 책임도 크다. '체코슬로바키아' 오기부터 '구겨진 태극기'까지 사건·사고도 많았다. 그렇다고 청와대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으로 부처를 들러리 삼는 건 곤란하다. 연간 예산 2조3600억원에 직원 2300여명이 일하는 외교부가 상처받고 신뢰를 잃으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외 주요 인사가 방한 때마다 청와대 핵심 인사 면담에만 목매는 것은 추락한 외교부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국정을 총괄하는 청와대가 공(功)만 취하고 과(過)는 떠넘기려 하면 공직 사회가 청와대를 믿고 따를 수 없다. 국민도 손뼉은커녕 불신의 눈길로 바라볼 것이다.

[안준용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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