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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정상회담과 '강제징용 배상' 사이… 文대통령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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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 "文대통령이 징용문제 대응해야"… 아베는 한국대사 압박

청와대, 日 파상공세에 침묵… 내달 G20 회의 앞두고 신중 모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21일 남관표 신임 주일 대사를 만나 강제징용 문제 등에 대한 한국 측의 '적절한 대응'을 요청했다고 교도통신이 보도했다. 전날 일본 정부가 징용 문제와 관련한 중재위원회 설치를 공식 요구한 데 이어 정상이 나서 이를 재차 강조한 것이다.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무상은 이날 "문재인 대통령이 책임감을 갖고 대응해야 한다"고도 했다. 양국 관계 경색 장기화에 따른 우리 정부의 부담이 커지는 가운데 외교가에선 '극적 절충'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日 "文 대통령 나서라" 전방위 압박

고노 외무상은 이날 외무성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국에 중재위 설치를 요청한 데 대해 "외교 문제인 만큼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 정부를 대표해 확실하게 책임을 지고 대응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측도 양국 관계를 더 이상 악화시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라며 "이낙연 총리가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말한 것을 듣고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겠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고노 외무상이 징용 문제와 관련해 문 대통령을 직접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외교 수장이 상대국 정상을 거명하는 것은 '외교 결례'의 소지가 있다. 그는 "국내에서의 대응책 검토에 한계가 있다면 당연히 중재위(개최)에 응해야 한다. 필요하면 국제사법의 장에서 제대로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이 문제에 대한 국제 외교전도 불사하겠다는 것이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도 이날 남관표 대사와 만나 "한국 정부의 책임으로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자민당 간사장은 기자회견에서 "상대방의 생각을 잘 듣고 원만하게 우호적으로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말했다. 아베 내각이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국내 정치용으로 이 문제를 활용한다는 말도 나온다.

◇묵묵부답 靑…"외교적으로 풀어야"

청와대는 이 같은 일본의 파상 공세에 공식 입장을 내지 않았다. 외교가에서는 중재위가 실제 가동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르면 중재위 요청은 상대국에 접수된 뒤 30일 이내에 양국이 중재위원을 선임함으로써 설치 여부가 결정된다. 한국이 여기에 응하지 않으면 사실상 가동은 어려워진다.

다만 외교 라인에서는 신중한 접근을 통한 '상황 관리'가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날 "중재위 개최와 외교적 협의 요청 모두에 대해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재위가 아닌 다른 차원의 협의 가능성도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 외교 소식통은 "중재위나 국제사법재판소가 아닌 다른 층위에서 외교적 절충점을 찾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한·일 외교장관은 23일 파리에서 열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연례 각료이사회에서 만나 회담을 갖는다. 외교부 당국자는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를 비롯한 상호 관심 사안이 폭넓게 논의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간 우리 정부는 일본 측의 '정부 간 협의' 요구에 사실상 불응해왔다. 정부 내 기류 변화 가능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G20, 상황 반전 모멘텀 되나

우리 정부가 중재위 설치 등 강제징용 대책 마련에 계속 소극적으로 나올 경우 국제사회에 '관계 경색은 한국 탓'이란 인식이 퍼질 우려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과 외교전을 벌일 경우 결과를 낙관하기 어렵다. 일본 정부가 압박 강도를 높이는 데엔 이 같은 계산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외교가에선 "한·일이 결국 일본에서 잇따라 열리는 대형 외교 이벤트와 강제징용 대책 마련을 연계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6월 오사카 G20 정상회의, 10월 나루히토(德仁) 일왕 취임에 따른 외교 행사, 내년 도쿄올림픽 등 일본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벤트가 이어진다"고 했다.

특히 다음 달 G20을 계기로 정상회담 개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강제징용 문제가 다뤄질 가능성이 크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는 "이런 식으로 상황을 방치한 상태에서 양국 정상이 만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호스트'인 일본이나 한·미·일 삼각 동맹의 한 축인 한국 모두에게 '회담 불발'은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게 대체적인 외교가의 분석이다.

[도쿄=이하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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