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9 (금)

[시론] 외국어 남발한 정책 용어들, 국민 소통 방해한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정부·국회·언론 뜻모를 용어 양산

쉬운 언어 써야 정책 효과도 좋아

중앙일보

소강춘 국립국어원 원장


국회에서 최근 ‘신속 처리 대상(패스트 트랙) 법안’ 지정을 둘러싸고 몸싸움 등 추태가 벌어져 ‘동물 국회’라는 오명을 다시 쓰게 됐다. 대의민주주의를 표방한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본분을 잊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다수 국민은 크게 실망했다.

실망감은 이런 격렬한 충돌에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다. ‘캐스팅 보트를 쥔 패스트 트랙 키맨 ○○○ 의원’ ‘○○○ 비토 파장’ ‘이번엔 사보임 놓고 극한 충돌’ 등 언론에서 접하는 낯선 외국어, 어려운 한자어는 또 한 번 국민의 소외감을 부추긴다. 정치는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근본이 돼야 할 것인데, 국민이 이해할 수 없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국민을 정치에서 더 멀어지게 만든다. 검색창에 ‘패’를 입력하면 가장 먼저 ‘패스트 트랙’이 등장하는 것은 많은 국민이 그 뜻이 무엇인지를 몰라 검색했음을 뜻한다. 즉 국회의원들이 싸우고 있는 이유를 국민이 모르고 있고 그것을 국민이 궁금해한다는 뜻이다. 정부를 견제하고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하는 의회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회는 정치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국민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바로 알려야 할 사명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알리는 데에는 반드시 국민 누구나가 알 수 있는 쉽고 바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어려운 말로 국민을 현혹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될 일이다.

어려운 용어 사용은 정치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의 정책 집행 과정에서도 어려운 용어는 흔히 나타난다. 규제 샌드박스, 스튜어드십 코드, 포괄적 네거티브, 제로 페이 등 중앙과 지방 행정기관이 경제 활성화를 위해 저마다 내놓은 정책들의 이름이다.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알 수 없다. 혹시 그 누구를 정책에서 소외시킬 목적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지난 2015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한 국민 언어문화 인식 실태 조사에서 일반 국민의 92%, 공무원의 88%가 국민 삶과 직접 연결된 공공기관의 언어가 쉬운 우리말로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만큼 정부에서 사용하고 국민에게 알리는 언어가 소통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공공기관의 언어 사용은 행정 효율성과 서비스 만족도에 큰 영향을 준다. 따라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정책 내용을 적절히 전달해야 행정 비용을 절약하고 정책 효과도 향상할 수 있다. 쉬운 언어 사용이야말로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을 피하는 첫 번째 고려 요소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573년이 흘렀다. 세종은 재위 16년에 관비(官婢)의 산달과 산후 100일 동안의 휴가도 모자라 산모인 관비의 건강을 돕기 위해 남편에게도 30일의 휴가를 주도록 법제화했다. 세종은 백성의 경작 토지에 대한 새로운 세법을 제정하면서도 “가난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옳고 그른가를 물어 아뢰라”(조선왕조실록)고 명했다. 빈부귀천과 관계없이 모든 백성을 대상으로 5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들여 조사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민투표라 할 수 있다. 백성을 하늘로 알고, 백성을 섬기는 성군의 진정한 애민 정신은 바로 이런 것이다.

백성 위에 군림하지 않고 백성을 섬기는 정신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소통의 창구가 마련돼야 완성될 수 있다. 누구나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한글 창제야말로 세종대왕의 애민 정신과 소통의 철학이 반영된 필연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신사대주의’에 빠져 외국어나 어려운 한자어가 아니면 자기 생각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무언가 있어 보이기 위해 어법에 맞지도 않는 외국어 투의 정책 이름을 짓는 언어문화 현실이 안타깝다. 이를 보면서 과연 우리가 세종대왕 당시보다 더 백성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가를 되돌아 본다.

소강춘 국립국어원 원장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