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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마음 읽기] 수희와 상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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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일을 내 일처럼 대해야

이타심은 자애 키우는데서 생겨

타인 살필 때 자타구분 없어져

중앙일보

문태준 시인.


나는 가끔 문단의 한 어른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그 선생님은 나의 고향인 김천을 지날 때마다 내게 전화를 하신다. 어느 날은 소나기가 퍼붓듯이 쏟아져 앞이 캄캄하다며 전화를 하셨고, 어느 날은 바깥 날씨가 유리처럼 맑다며 전화를 하셨다. 김천을 지나가니 내 생각이 났다며 안부를 함께 물으셨다. 최근에는 전화를 해서 “축하해. 좋은 일이 생겨서 내 일처럼 기쁘다.”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이 선생님은 김용택 시인이다. 선생님은 시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에서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라고 쓰셨다. 누군가 선생님께 달이 떴다고, 강변에 달빛이 아주 곱다고 전화를 해서 당신의 마음에 환한 달이 떠올랐던 것처럼 나도 김용택 선생님의 전화 덕분에 잠시나마 내 고향을 다녀온 듯한 기분이 들었고, 내게 온 좋은 일도 기쁨이 두 배가 되었다.

다른 사람에게 생긴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생긴 슬픈 일이 내 슬픈 일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생긴 기쁜 일이 내 기쁜 일이 되는 것은 겸손과 유순함과 배려와 연민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마음이 바로 격려와 위로가 태어나는 곳이다. 특히 위로는 연두의 새잎과 같은 생기를 얻게 한다. “좋은 위로는 어여쁜 사랑이니,/ 오래된 급류 가의 어린 딸기처럼.”이라고 시인 프랑시스 잠이 멋지게 노래했듯이.

‘수희(隨喜)’는 함께 기뻐한다는 뜻이다. 다른 이가 잘한 일을 내가 잘한 일처럼 여기고, 다른 이에게 일어난 경사를 내게 일어난 경사로 여기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수희의 경험은 나의 옛 시간에도 빛나는 보석처럼 박혀 있다. 어릴 적 시골의 동네에서는 결혼식이나 환갑이 있으면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집에 들러서 함께 음식을 장만했다. 전을 부치고 국을 끓이고 고기를 썰었다. 잔치를 맞은 집은 흥성흥성했다. 환갑을 맞은 어른을 동네 사람들이 업고 마당을 빙빙 돌았다. 내 부모 모시듯이 했다. 다른 이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온전히 받아들였다. 이런 일은 농사일을 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함께 모를 심었고, 함께 탈곡을 했다. 농사일에 서로서로 손을 보태는 날에는 어머니들이 광주리에 들밥을 이고 들판으로 오셨다. 논두렁과 밭두렁에 함께 앉아 들밥을 나눠먹으며 숨을 돌렸다.

물론 수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이타심은 스스로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타심을 키우는 일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애를 키우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고 용서할 때, 다른 이들을 아끼게 되고 사랑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는 까닭이다. 도연 스님은 최근에 펴낸 책에서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본 것을 열린 마음과 친절함과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근본적 수용이다.”라는 타라 브랙(Tara Brach)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것을 당부한다. 자기 자신이 부족하더라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일이 곧 스스로 온전해지는 일이며, 자신이 온전해진 이후에 다른 이들이 온전해지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련(相憐) 또한 다른 사람의 처지를 나의 처지라고 똑같이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프면 내가 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여겨 그를 돌보고, 가족을 떠나보낸 다른 사람의 슬픔을 나의 것으로 깊이 여겨 그의 슬픔과 함께 하는 것이 상련이다. 수희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최초로 찾아온 축하객이 되는 일이요, 상련은 마지막까지 곁에 남아 자리를 지키는 위문객이 되는 것이다.

“꽃이 너를 사랑할 때까지 너는 꽃을 사랑하지 말라.” 이 말은 혜총 스님이 자운 스님을 모실 때 들었던 말씀이라고 한다. 혜총 스님이 꽃과 나무를 가꾸는 일에 즐거움을 얻어 나중에는 산야에서 캔 묘목을 화분에 심어 분재로 가꾸기에 이르렀는데, 어느 날 화분의 묘목이 다 말라 죽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크게 낙담하여 슬퍼하고 있자 이를 본 자운 스님이 “네가 꽃을 사랑하느냐? 꽃도 너를 사랑하느냐? 꽃이 너를 사랑할 때까지 너는 꽃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셔서 크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내 의욕 때문에 묘목이 받았을 고통을 까맣게 잊고 사는 경우가 있다. 수희와 상련도 다른 이의 형편을 살피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러할 때 자타(自他)의 구분이 없어진다. 다른 사람의 일이 내 일이 되는 것이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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