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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처럼 청춘을 사르고…자연으로 돌아간 산골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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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박자박 소읍탐방]국내서 가장 인구가 적은 읍, 영월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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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읍의 중심이었던 구래리 풍경. 외관은 곱게 페인트로 단장했지만 실제는 낡고 허물어져 빈집이 많다. 영월=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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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영월 얘기 하지 마, 여기는 상동이라고 상동.” 상동에서 나고 자라 상동에서 초ㆍ중ㆍ고등학교를 다녔다는 50대 후반의 남성은 ‘영월군 상동읍’이라는 표현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드러냈다. 한때는 인구나 경제에서 영월읍보다 한 수 위(上)였다는 자부심과 이제는 영월에서도 가장 소외된 지역이 돼버렸다는 섭섭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중석(텅스텐) 광산이 호황이었던 시절 3만명에 육박했던 상동읍 인구는 올 4월 기준 1,118명으로 줄었다. 전국의 읍 단위 행정구역 중 가장 적을 뿐만 아니라 영월군의 다른 면과 비교해도 꼴찌다. 영월읍내에서 상동까지는 약 45km로 물리적 정서적 거리는 오히려 태백에 가깝다.

◇사람 떠난 주름은 자연이 치유하고

아무리 애써도 세월은 극복하지 못한다. 화장과 성형 기술로 어느 정도 가릴 수는 있어도 속주름까지 완전히 감춰지지는 않는다. 인생에 비유하면 상동은 불꽃처럼 청춘을 불태우고 서서히 나이 들어가는 초로의 시기다. 중석 광산이 문을 닫고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간 빈자리는 푸르른 자연이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그래서 상동은 볼품없는 시골 마을이 아니라, 생명이 꿈틀거리는 힐링의 장소다. 주름의 결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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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래리 교량 귀퉁이는 갱도를 밝히던 램프 모형으로 장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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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래리 곳곳에 앙상한 속살을 드러낸 빈집이 많고, 철거 작업도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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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닫은 상동 중앙교회 첨탑이 버려진 영화 세트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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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 천주교회도 신도가 줄어 위상이 공소로 격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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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곳이라 특정할 것 없이 상동의 현재 모습은 한적한 산골 마을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중심이라 하면 구래리다. 상동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대한중석 광산 초입에 마을의 상징적인 존재와 같은 ‘꼴두바위’가 제법 우람하다. 바위 아래 작은 산신당이 있고, 바로 옆에 치성을 드리는 여인상이 놓여 있다. 자식을 얻기 위해 백일기도를 하던 여인이 시어머니의 핍박으로 날을 채우지 못하고 결국 죽고 말았다는 전설이 적혀 있는데, 결말이 다소 황당하다. ‘하늘에서는 꼴두바위로 하여금 이 여인을 대신해 중석을 잉태하게 해 한을 풀었다’고 이야기를 맺는다. 터무니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는데, 상동에서 중석은 자식만큼 소중한 존재였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궁벽한 산간이었던 상동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부터 중석 광산 개발로 인구가 크게 불었다. 해방 후 광산 개발은 더욱 활발해졌다. 국영기업인 대한중석은 한때 전 세계 중석 시장의 8%를 차지하고 대한민국 전체 수출액의 60%를 담당하기도 했다. 한국판 ‘골드러시’로 1973년 상동면은 읍으로 승격되고 최대의 호황을 누렸지만, 1980년대 후반 값싼 중국산 중석을 대량 수입하는 바람에 상동 광산은 1992년 채굴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대한중석은 이스라엘에 본사를 둔 IMC그룹에 자산을 매각해 현재 광산은 외국계 기업의 손에 넘어간 상태다. 올해부터 다시 채굴 작업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얘기가 파다하지만 상동 주민의 무너진 자존심을 다시 세우기는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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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읍의 상징 꼴두바위. 안내판에 중석을 잉태했다는 전설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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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대한중석 광산에 굴뚝만 우뚝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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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턱의 광산 건물이 버려진 고성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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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두바위에서 왼편으로 난 도로로 조금만 올라가면 산골짜기에 용도를 알 수 없는 굴뚝 하나가 높게 솟아 있다. 산 중턱에는 버려진 고성처럼 콘크리트 건물이 남아 있는데, 아래에는 영화에 나올 법한 대형 중장비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상동읍의 한 공무원은 광산 개발이 재개된다 해도 기계 한 대가 수백 명의 인력을 대신할 것이기 때문에 상동이 옛날처럼 번창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꼴두바위 맞은편 산자락과 닿은 도로변 주택은 외벽을 파스텔 톤 페인트로 깔끔하게 단장해 겉보기에는 제법 그럴싸하다. 그러나 마을로 들어서면 앞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오래된 주택의 허물어진 골격이 앙상하게 드러난다. 일부에서는 철거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남아 있는 집이 많지 않아 2만~3만명이 거주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데, 한 주민은 산자락이고 하천 변이고 조그만 땅만 있어도 전부 집을 지었고, 방방마다 대여섯이 살을 붙이고 살았다고 말했다.

살림집이 사라진 자리에는 다시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숲이 되었고, 자투리 땅은 텃밭 겸 정원으로 변신해 지금 구래리는 궁벽하지만은 않다. 어찌 보면 산촌의 여유가 느껴질 정도다. 상동시장도 한산하기는 마찬가지다. 광부가 떠난 마을 어귀에는 가상의 상동 광부 ‘K씨’의 일상을 표현한 조형물이 지키고 있다. 너무 많은 학생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없어 오전ㆍ오후반으로 나눠 수업을 진행했던 구래초등학교 운동장은 더없이 넓고 평화롭다. 한때 2,000명이 넘었던 전교생은 지금 20명이 되지 않는다. 학교 담장에는 상동의 자부심을 잊지 않으려는 듯 꼴두바위 이야기, 구래리 지명 유래, 칠랑이골 전설 등 지역의 자랑거리를 모자이크 벽화로 장식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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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한 상동시장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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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시장 어귀에 마을 주민들의 모습을 그린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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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떠난 자리를 가상의 상동 광부 ‘k씨’ 조형물이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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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버스정류소 옆 상동 시계점. 겉모양만 시계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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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래리는 신라시대 자장법사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할 장소를 찾기 위해 이 마을을 아홉 차례 다녀갔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결국 진신사리는 구래리에서 산 하나를 넘어 정선 정암사에 봉안됐다. 일곱 규수가 맑은 물을 마시고 절세가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간직한 칠랑이골은 여름철 피서지로 제법 알려져 있다. 태백 화방재에서 상동으로 이어지는 계곡이다.

칠랑이골이 피서객을 위한 시설을 조금 더 갖췄다 뿐이지 사실 상동읍내 하천 어디나 발만 담그면 피서지다. 하천 변의 오래된 주택을 허물어 계곡이 차츰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기 때문이다. 전성기를 누렸던 주민들로선 안타까운 마음이 크겠지만, 인간에게 터를 내주었던 산과 강은 또 그렇게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중이다.

◇’천상의 화원’ 만항재에서…꽃보다 사람

해발 1,330m, 국내에서 차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포장도로가 통과하는 만항재는 정선ㆍ태백ㆍ영월을 가르는 경계다. 정선 고한읍에서 구불구불 오르던 414번 지방도는 만항재에서 영월 상동읍으로 가파르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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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항재는 이제 봄 꽃이 한창이다. ‘하늘 숲 공원’에 얼레지가 곱게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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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고한읍에서 조성한 만항재 공원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야생화가 끊임없이 피고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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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항재 야생화 공원에 하얀 바람꽃이 하늘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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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야생화가 피고 지는 만항재는 천상의 화원으로 불린다. 계절이 여름으로 치닫는 시기, 만항재에는 이제야 봄꽃이 한창이다. 잘 정돈된 잎갈나무 그늘 아래 분홍 얼레지와 하얀 바람꽃이 한창이고, 현호색과 산괴불주머니도 하늘거린다. 본격적인 여름으로 접어들면 동자꽃, 하늘나리, 범꼬리 등이 다시 한번 숲을 환하게 밝힌다. 힘들여 등산하지 않아도 눈만 돌리면 야생화 천국이다. 도시락 하나 챙겨서 돗자리만 펴면 천상의 소풍이다.

고지대인 만큼 만항재 자체가 피서지다. 30도에 육박하는 기온에 반바지 차림으로 올라갔다가 서늘한 바람에 좀 떨었다. 야생화에 흠뻑 취했다가 상동으로 내려가는 길목 한 남자를 만났다. 만항재 여행객은 대부분 고갯마루에 조성한 ‘하늘 숲 공원’에서 쉬어가기 마련인데, 인천에 산다는 김씨(47)는 첩첩 산줄기가 이어지는 상동 방향을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30여년 만에 고향집을 찾아본다고 왔는데, 마을은 숲에 묻히고 집터도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가 없어 서글프네요.” 그가 살던 강동마을은 만항재와 상동읍 중간, 산속 어디쯤이라고 했다. 초등학교도 있었고 100여가구가 살던 마을이었는데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세월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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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항재에서 상동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면 첩첩이 산줄기가 겹쳐진다. 30년만에 고향을 찾았다는 김씨가 자신이 살았던 마을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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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 산줄기 너머로 떨어지는 만항재 일몰 장면은 야생화와는 또 다른 뭉클함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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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나게 힘들었던 산골살이였지만, 신문에는 아름다운 추억만 써 달라고 부탁했다. 강동마을에서 중학교가 있는 상동까지는 걸어서 1시간30분에서 2시간이 걸렸다. 상동읍내의 학생들은 도시락 반찬으로 멸치며 소시지, 계란 프라이 정도는 싸 오던 시절이었는데 산골마을 아이들은 겨우 고추장과 김치만 싸 가던 형편이었으니 늘 배가 고팠다. “그래서 봄이 오기만 기다렸죠. 6월이면 길 따라 산딸기가 쭉 열려요. 먹을 수 있는 것만 서너 가지가 됐죠. 가을로 접어들면 다래와 머루도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잠깐만 따면 한 소쿠리 채우는 건 일도 아니었어요. 어떨 땐 너무 많이 먹어 배탈이 나기도 했어요. 군데군데 커다란 돌배나무도 꽤 있어요. 돌배 하나 먹으면 갈증도 사라지고 든든하고 힘이 났죠.” 먹을 게 부족했지만 사람을 살린 건 결국 자연이었다며 말을 이어간다.

“하루는 무얼 잘못했는지 학교에서 벌을 서고 좀 늦게 하교하다가 날이 어두워졌어요. 길가에 잠시 누워서 별을 세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정말 꿀 잠이었어요. 눈을 떠 보니 초롱초롱한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 같았어요. 그 밤하늘을 잊을 수 없어요.” 마침 먼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30년 만에 왔는데 시선이 저절로 상동 방향으로 향하더라고요. 아마 해질 때의 아름다운 기억이 오래 남아 있어서 그럴 겁니다. 석양이 되게 예쁘죠?” 붉게 물든 하늘 아래 겹겹이 포개진 산줄기 경계가 차츰 흐릿해지고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계곡도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영월=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