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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박성진의 군 이야기]이종명 대대장은 정말 살신성인의 ‘지뢰 영웅’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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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국회에서 질의하고 있는 자유한국당 이종명 의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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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이종명 의원(60·육사 39기)이 ‘영웅 조작설’ 논란에 휩싸였다. 이종명 의원이 2000년 6월27일 전방 수색부대 대대장(중령)으로 근무할 당시 지뢰를 밟은 후임 대대장을 구하려다 자신도 지뢰를 밟는 사고를 당했을 때의 육군 발표에 여러 가지 의문이 일고 있는 것이다. 사고 이후 이종명 대대장은 언론 등에서 거의 ‘살신성인 영웅’으로 대접받았고, 2002년엔 제1회 ‘올해의 육사인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16년 초에는 당시 새누리당 비례대표 2번으로 20대 국회에 입성했다. 그는 보국훈장 삼일장도 수상했고, 육군은 그의 영웅담을 기반으로 군가는 물론 뮤지컬(<마인>)까지 제작했다. 육군 1사단 주둔지인 경기 파주시에 이 중령의 희생정신을 기린다는 취지에서 ‘살신성인탑’도 세웠다.

그러나 사고 초기부터 군 내부에서는 ‘이종명 중령은 영웅이 아니라 징계 대상’이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논란의 핵심은 당시 이종명 대대장이 규정을 준수하지 않고, 후임 대대장 등을 데리고 수색로를 이탈해 지뢰밭으로 들어가 위험을 자초했느냐의 여부다.

■ 왜 ‘사고자’에서 ‘관계자’로

“참군인” 언론들 띄우기

2000년 수색부대 근무 당시

지뢰 밟은 후임 구하려다

자신도 지뢰 밟고 쓰러져

영웅담 발판, 국회 입성도


2000년 6월27일 오전 9시쯤, 판문점 동쪽으로 5㎞ 떨어진 비무장지대. 육군 1사단 수색대대원 20명이 최전방 지역 정찰에 나섰다. 이날 정찰엔 수색대대장 이종명 중령과 후임 대대장 설모 중령도 참가했다. 군사분계선 근처에 다다른 오전 10시40분쯤, 폭음과 함께 앞서 가던 설 중령이 1950년대 매설된 대인지뢰를 밟고 쓰러졌다.

이종명 중령은 병사들의 접근을 막은 뒤, 지형을 잘 아는 자신이 구조하겠다며 쓰러진 설 중령에게 혼자 다가갔으나, 잠시 뒤에 이 중령 역시 지뢰를 밟고 쓰러졌다. 이 중령은 두 다리를 잃고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위험하니 오지 말라’며 자신에게 접근하려던 병사들을 제지했다. 그런 뒤, 철모와 소총을 끌어안은 채 혼자 힘으로 기어서 사고현장을 빠져나왔다는 게 군의 설명이었다.

당시 국방부 합동조사단이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에게 보고(6월28일)한 중간 사건보고서에는 이 중령과 설 중령은 ‘사고자’로, 중대장 박모 대위는 ‘피해자’로 분류됐다. 1사단 헌병대 보고서 역시 6월28일부터 7월31일까지 일관되게 이 중령과 설 중령을 ‘사고자’로 규정했다. 이 중령과 설 중령이 사고를 일으킨 당사자들이란 의미다.

그러나 당시 언론에서 이 중령을 ‘살신성인’의 표상으로 보도한 이후 육군참모총장과 육군 헌병감에게 올라간 ‘중요 사건 보고’에는 이 중령과 설 중령, 그리고 박 대위 모두 ‘관계자’로 기재됐다. 육군 헌병이 왜 보고서를 2가지 버전으로 만들었는지는 재조사를 통해 밝혀야 할 것이다.

경향신문

자유한국당 이종명 의원(60·육사 39기)은 전방 수색부대 대대장(중령)이던 2000년 6월 지뢰를 밟은 후임 대대장을 구하려다 자신도 지뢰를 밟는 사고를 당했다고 알려지면서 언론 등에 ‘살신성인’ ‘영웅’으로 표현됐다. 사진은 사고 당시 발목이 절단돼 지팡이를 짚고 있는 전역 때의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 수색로인가, 미개척지인가

이 중령 일행이 수색로를 벗어난 정황은 논란의 핵심적인 의문이다. 국방부 합동조사단이 사고 다음날인 28일 국방장관에게 보고한 문건은 사고 장소를 ‘미개척된 3m 지점’으로 특정하고 있다. 문건은 사고 장소를 ‘99. 3. 23 수색대대에서 새로 개척한 GP 작전도로 MDL(군사분계선) 끝부분에서 미개척된 약 3m 지점임’이라고 기술했다. 사고 당일 헌병감실이 작성해 육군참모총장 등 육군본부 고위 간부들에게 배부한 보고서에도 지뢰 사고 장소가 ‘MDL, 작전로 부근 앞’이라고 되어 있다.

작전로가 아닌 곳에서 지뢰를 밟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1사단 상급부대인 1군단이 사고 다음날 실시한 현장 조사 결과를 담은 5부(정보·인사·군수·감찰·헌병) 합동보고서에는 사고 현장이 “수풀이 많아 식별 곤란(5m 후방에서 관찰)”으로 기술됐다. 정확한 폭발 지점을 찾지 못했고, 사고 현장에 제대로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사고가 수색로를 이탈한 지점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대목이다. 5부 합동보고서에 사고 원인이 ‘수색로 부근에서 M3 대인지뢰(추정)를 밟아 발생’으로 분명하게 적힌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 보고서는 사고 장소를 ‘수색로’가 아닌 ‘수색로 부근’으로 분명히 적시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이종명 의원은 최근 MBC 방송 인터뷰에서 “(사고 장소가) 수색로상이었고, 개척된 그 수색로를 5~6번 이상 정찰했던 장소”라고 반박했다. 당시 중대장이었던 박모 대령도 경향신문의 서면 질의에 ‘(사고 장소가) 개척된 수색로였다”고 답변했다.

이들이 수색로가 아니라 미개척지에 들어가 지뢰를 밟았다면 당사자들은 징계 대상이라는 게 군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당시 사고는 전·후임 수색대대장이 지뢰를 밟아 둘 다 발목이 잘리고, 중대장까지 다쳐 최전방 대대 지휘부가 붕괴된 사건이었다. 이 때문에 설사 정상적인 수색로라고 해도 이동 중 지뢰가 두 번이나 터졌다는 사실은 제대로 지뢰를 제거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수색로를 제대로 개척하지 못한 것으로, 이에 대한 책임을 지휘관에게 묻는 게 상식이라는 지적이다. 또 수색로를 이탈해서 사고가 난 것이라면, 지휘관이 규정 위반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 소재를 명확히 가리기 위한 정밀 조사가 이뤄졌다면 훈장 대신 징계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또 연대장과 사단장까지 줄줄이 책임지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 관측 중이었나, 복귀 중이었나

사고가 일어난 시점,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도 논란거리다. 육군 헌병과 5부 합동조사단의 보고서는 일관되게 이 중령과 설 중령, 박 대위 등이 군사분계선 가까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사단 헌병 보고서에 따르면, 중대장 박 대위는 “정보장교가 (1000㎜ 니콘카메라로) 사진촬영한 곳에서 지형을 관찰하던 이 중령과 설 중령이 공간이 협소해 군사분계선 방향 우측 수색로 약 15m 지점으로 이동했다”며 “이 중령이 좌우측 지형 설명을 해주자 설 중령이 우측 지형을 상세히 보기 위해 약 5m 맨 앞에서 접근하다 사고가 발생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 의원은 방송 인터뷰에서 사고 장소 등을 포함해 군의 공식 조사보고서에 담긴 사실관계 대부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MDL 선상에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나오면서 일어난 사고”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내가 제일 앞에 가고 그다음에 중대장이 가고 설 중령이 맨 뒤에 따라갔고. 돌아나오는 게 설 중령이 맨 앞에 나오고 내가 맨 뒤에 나왔다”면서 “그 역순으로 나오는데 (맨 앞에 섰던) 설 중령이 지뢰를 밟았다”고 설명했다.

당시 적진을 관측하려는 과정에서 사고가 일어났다고 진술했던 박 대위는 경향신문 질의에 “이 중령이 (군사분계선 쪽으로) 진출할 때도, (안전지대로) 복귀할 때도 제일 선두에 있었다”고 답변했다. 이는 그가 1사단 헌병 및 1군단 합동조사에서 진술했던 내용과도 상이한 데다 ‘복귀할 때는 설 중령이 앞쪽에 있었다’고 한 이 의원의 발언과도 배치된다.

경향신문

이종명 중령이 ‘사고자’로 표기된 육군 헌병감실 보고서(위 사진·사고 발생일인 2000년 6월27일 작성돼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됨)와 이 중령이 ‘관계자’로 표기된 헌병 보고서(가운데·사고 발생 다음날인 6월28일 작성), 국방부 합동조사단이 6월28일 국방장관에게 전달한 보고서에는 사고 장소가 ‘작전도로 MDL 끝부분에서 미개척된 약 3m 지점’이라고 명기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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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순되는 정황들

“위험 자초한 징계 대상”

‘사고자’에서 ‘관련자’로

보고서에 변경 기재 의문

수색로 아닌 미개척지에서

사고 발생했다는 기록도

정밀 재조사 필요성 제기


1사단 헌병 보고서와 1군단 5부 합동보고서를 보면, 사고 당시 이 중령은 “6월27일 오전 10시42분경 ○○○ GP 추진철책 작전로상을 약 5m 앞서가던 설 중령이 갑자기 ‘꽝’ 소리와 함께 쓰러졌고, 뒤따르던 정보장교에게 병력 접근 통제를 위해 ‘내가 지형을 아니까 너희들은 기다려라’라고 한 후 사고 장소로 들어가다 지뢰가 폭발해 다리를 다쳐 혼자 기어서 나왔다”고 진술했다. 이 같은 이 중령의 진술과 정보장교의 진술 등을 종합하면, 당시 맨 앞에는 설 중령과 중대장이 가고, 5m 뒤에 이 중령, 이 중령의 5m 뒤편에 정보장교가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대장이 지휘하는 2개 수색조는 사고 장소에서 약 30m 후방에 있었다.

그러나 이 중령은 사고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1차 지뢰 폭발 당시 자신과 설 중령, 박 대위 등 세 사람이 2m 범위 안에 있었다고 했다. 이는 설 중령이 이 중령의 5m 전방에 있었다는 군 조사보고서 내용과는 거리가 있다. 박 대위도 이 중령의 주장이 맞다고 했다. 이들의 주장이 맞다면 군 조사보고서가 틀렸다는 얘기다.

2차 지뢰 사고로 이어진 것도 논란거리다. 이 중령이 설 중령을 구하겠다고 했지만 2차 사고를 일으켰고, 결국 설 중령을 구조한 사람은 사고 지점 30m 뒤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소대장이었다. 설 중령은 2차 지뢰 폭발 파편에 머리를 다쳐 정상적인 언어소통과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상태다.

군내에서는 국방부가 직접 나서 정밀 재조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박성진 안보전문기자 longriv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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