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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기 전에… 우리는 '원조 힙지로'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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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노포]

연탄돼지갈비부터 생태탕까지… 골목에 포진한 오래된 맛집들

"이 정든 단골집을 올해 넘기면 못 온다고 생각하니 너무 아쉽고 속상하더라고요." 이탈리아 화장품 회사에서 일하는 임태경 부장은 주말이면 서울 을지로의 노포(老鋪)를 찾아다니는 마니아. 특히 연탄돼지갈비를 파는 '경상도집'과 소고기전과 코다리찜 맛있기로 소문난 '우화식당'을 즐겨 찾았다. 임 부장은 "철거돼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 이곳만의 맛과 분위기가 사라질까 두렵다"면서 "해를 넘기기 전 부지런히 단골집을 찾아다닐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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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80년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조선옥'의 양념소갈비. ▲'원조녹두'의 해물파전. 고기 녹두, 고추전, 동그랑땡도 유명하다. ▲'세진식당'의 생태탕과 오징어제육볶음 한 접시. ▲한우 등심으로 유명한 고깃집 '통일집' 앞 골목 풍경. ▲도톰한 칼국수 면에 매일 아침 직접 갈아 만든 진한 콩 국물이 일품인 '우일집'의 점심 메뉴 서리태 콩국수(8월 중순까지 판매). /이태경·김지호 기자,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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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허름하지만 그래서 매력적인 식당들이 곳곳에 숨은 서울 을지로 골목. 최근엔 20~30대들이 "이보다 힙한 곳이 없다"고 열광하면서 '힙지로'란 별명으로 불린다. 힙지로에 포진한 오래된 맛집 대부분은 서울시가 추진하는 '세운 3구역 재개발 계획'으로 올해가 지나면 철거될 가능성이 높다. 노포를 헐고 지상 20층 규모 주상 복합 건물이 들어설 예정. '원조 힙지로 맛집'들을 만날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해서 가게들 앞엔 줄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사라지기 전에…원조 힙지로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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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오전 10시 감잣국으로 유명한 을지로 '동원집'엔 1층 8석과 2층 13석 자리가 꽉 들어찼다. 본래부터 손님이 많은 가게이지만 요즘엔 더 많이 몰린다고 했다. 사장 윤순녕(64)씨는 "우리 집 맛을 기억하는 어르신 단골에 옛날 맛이 궁금한 젊은 사람들까지 몰린다"며 웃었다. 돼지 사골 육수에 돼지 목뼈와 알감자를 팔팔 끓여낸 이곳 감잣국은 35년째 맛이 변하지 않기로 소문났다. 원조 을지로 맛집의 대표주자다.

신세계 L&B 김설아 마케팅파트장은 최근 생태탕과 오징어숙회로 유명한 을지로 '세진식당'을 통째로 빌려 파티를 열었다. 소박한 안주를 곁들여 술 먹기 좋아하는 친구들 수십 명과 밤새 놀았다고 했다. 김 파트장은 "세진식당은 철거 계획이 구체적으로 나온 건 아니지만 단골집이 헐리기 전 소중한 추억을 박제하는 기분으로 모임을 가졌다"면서 "내공 있는 맛집들이 헐리기 전에 이런 파티를 몇번 더 할 계획"이라고 했다. 번역가 김세영씨도 을지로 '도장 깨기' 순례를 거의 매일 하는 사람. 김씨는 "그저께는 '호반집'에서 닭무침을 놓고 소주를 마셨고 어제는 '원조녹두'에서 고추전과 동그랑땡을 먹었다. 한곳도 빼놓지 않고 돌아보며 나만의 이별 의식을 치르고 있다"고 했다. 점심엔 서리태 콩국수나 칼국수를 팔고 저녁엔 대창과 막창을 파는 '우일집', 순대로 유명한 '산수갑산', 군만두 맛있는 '오구반점' 등도 요즘 들어 손님이 더욱 북적이는 곳. 상당수는 "이 맛이 잊힐까 두려워 더 자주 오게 된다"고 입을 모았다.

◇'옥동자'들의 聖地를 아십니까

오래된 음식점 중엔 옥(屋)이나 관(館)으로 상호가 끝나는 곳이 적지 않다. 젊은 세대들은 이런 가게를 주로 찾는 이들을 두고 '옥동자'라 부른다. 곰탕과 내장탕으로 유명한 '보건옥', 구워서 나오는 양념소갈비로 80년째 영업하는 '조선옥', 60년째 설렁탕을 파는 '문화옥' 등이 옥동자들의 성지(聖地)로 꼽힌다. 조선옥 사장 김진영(55)씨는 "오래 한자리에서 열심히 살아왔다. 60년간 함께해준 주방장이 벌써 78세다. 그게 우리의 내공이라면 내공이고 비결이라면 비결일 것"이라고 말했다.



[송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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