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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일사일언] 감정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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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박근영 영화 '한강에게' 감독


까맣게 잊고 지냈던 이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영화를 보고 연락한 것이라고 했다.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린 것이 야속한 듯 우린 담담하게 안부를 물었다. 흘려보낸 말들 속에 맴도는 말이 하나 있었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을 참았다는 말이었다. 통화보다 영화로 더 많은 대화를 나눴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말을 하는 일에 서툴다. 말을 하기에 앞서 자주 망설이고 머뭇거린다. 어딘가 연락할 일이 생겼을 때 중하지 않은 일임에도 3일 정도는 어떻게 말을 할지 상상하며 망설인다. 어쩌다 말을 많이 쏟아낸 자리에서 돌아오는 길엔 했던 말을 죄다 다시 복기하기도 한다. 피곤한 노릇이다.

본래 쑥스러움이 많거니와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인지 감정을 표현하는 일에도 재능이 없다. 오랫동안 마음을 쏟았던 일이나 의지해온 사람들에게 진솔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머뭇거리다가 가슴 한편으로 삼켜버리곤 한다. 말이 되어 몸 밖으로 나가는 순간 마음이 휘발될까 벌벌 떠는 것 같다. 하물며, 사랑은 오죽할까. 시(詩) 쓰기를 좋아하고 영화 만드는 일을 하는 것도 이런 성격 탓일지 모른다. 문장의 행간에, 장면의 정서와 표정에, 간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일종의 해방구 혹은 도피처가 되어준다. 더구나 문장과 장면은 언제든 되돌려 지우거나 바꿀 수 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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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다 보니 영화를 만드는 일이 감정을 기록하는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잦다. 미처 표현하지 못한 감정뿐 아니라 잊지 말아야 할 감정이 이 세상에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고, 이 숱한 감정을 영화에나마 담아두고 기억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내게 영화는 창작보다 채집에 가깝다. 허구의 이야기에 담아둔 감정은 휘발되지 않고 언제든 다시 꺼내 볼 수 있겠지. 이렇게 망설이다 삼켜버린 마음들로 영화를 만들고 있다.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수많은 미안함과 고마움과 애정에 대한 아주 긴 변명이다.





[박근영 영화 '한강에게'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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