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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권영민의사색의창] 책 안 읽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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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당 월 도서 구매비 4960원 / 통신비 3만5000원 지출과 대조 / 책 멀리하면 삶 점차 황폐해져 / 한 달에 시집 한 권씩 읽기 추천

지난해 우리나라 가구당 월평균 소비 지출액은 250만원을 조금 넘는다. 통계청이 발표한 이 통계자료에서 가구당 오락·문화 부문 지출이 월평균 19만2000원이라고 한다. 전년보다 거의 10% 증가했단다. 한국출판저작권연구소에서는 이 자료에 근거해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월평균 도서 구매 비용이 4960원이라는 흥미로운 분석 결과를 내놓고 있다. 가구당으로 따지면 월평균 도서 구매비가 명목액 기준으로 1만2000원 정도이지만, 2006년 이래 역대 최저치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수치를 두고 가구당 한 달에 책 한 권 정도를 구매하고 있다는 뜻으로 간단하게 넘겨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자녀들의 학습용 참고서 구매를 제외하고 본다면, 집에서 책을 사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고급 커피숍에서 지불하는 커피 한 잔 값 정도에 불과한 액수가 한 달에 책을 사는 데에 쓰는 돈이라고 말하면 좀더 실감이 난다.

세계일보

권영민 미국 버클리대학 겸임교수 문학평론가


이런 말을 꺼내면, 요즘 먹고살기도 바쁜데 무슨 책 타령이냐고 핀잔을 하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 달에 책 한 권도 제대로 사지 않는 것을 빠듯한 살림살이 탓으로만 돌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구당 월평균 통신비가 13만4000원이었다는 통계가 바로 뒤에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집에서 매달 지출하는 여행비용을 비롯해 영화 구경이나 공연 관람, 서적 구입 등 문화 오락비에 버금갈 정도로 통신비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는 것은 놀랍다. 네 식구가 함께 사는 집이라면 1인당 3만5000원 가까이 통신비를 지출하고 있는 셈이다. 가족들이 모두 휴대전화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책 대신 스마트폰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지 스마트 폰을 누르면 찾을 수가 있으니 구태여 돈을 써서 책을 사고 답답하게 책장을 또 넘겨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핑계를 댈 수도 있지만 그 말에 수긍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다른 이유도 얼마든지 들 수 있다. 대학 입시에 매달려 지겹게 책과 씨름했던 젊은이들이 취업 준비로 다시 손에 잡은 것은 각종 시험 준비서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가까스로 직장을 얻어 생활 전선에 뛰어든 사람들은 아예 책을 펼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다. 주어진 업무에 시달리고 반복되는 모임에 지쳐 돌아오면 집에 들어와 책장을 넘길 틈도 없다. 자녀 뒷바라지에 정신이 없는데 집안 살림에 쫓기면서 주부들이 언제 한가하게 책을 들고 읽어볼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모두가 바쁘고 여유가 없고 한가할 틈이 없다. 여간 결심이 아니고서는 서점이라도 한번 들러 책 한 권 사들고 오기가 쉽지 않다.

수년 전의 일이다. 집집마다 거실의 장식장을 걷어내고 그것을 서가로 바꾸자는 운동이 일어났었다. 책과 가까이하기 위해 만들어낸 방안이었는데 그때는 상당한 호응을 얻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지금은 그 운동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다. 다시 커다란 TV가 벽면을 장식하고 근사한 도자기나 사진틀로 가득 찬 새로운 장식장이 서가를 다시 퇴출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거실에 서가를’이라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많은 호응에도 불구하고 왜 생활 속의 책 읽기로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는지 모르겠다. 책 읽기를 생활 속에 정착시킬 수 있는 다양한 실천 프로그램이 뒤따르지 못했다는 것이 아쉽다.

생활 속의 책 읽기는 개인의 취향과 관심에 달려 있다. 책을 읽는 데에 시간적·경제적 여유를 따질 일은 더욱 아니다. 생활 속의 책 읽기는 책을 선택하는 일에서부터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 책은 혼자서 읽을 수 있지만 서로 의견을 나누며 함께 꾸준히 읽어갈 동료가 있다면 훨씬 좋다. 직장에서든지 마을의 이웃끼리든지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모여 책을 읽는다면 그보다 더 좋은 문화 활동이 어디 있겠는가. 책 읽기는 습관화하기 전까지는 생활 속에 터잡기 어렵다. 일상의 모든 일이 책 읽기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제대로 책 읽기를 시작하면 큰 부담 없이 오랫동안 이어갈 수 있다. 고급한 취미 활동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평생 책을 끼고 살아왔다. 나의 책 읽기는 내 문학 공부의 출발이고,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작품을 제대로 읽지 않고서는 텍스트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고, 작가의 목소리를 가늠해 들을 수 없다. 책 읽기가 일종의 직업이 되면 때로는 짜증나고 힘이 든다. 텍스트를 가운데 두고 작가와 맞서야 하는 일이 늘 피곤하다. 그러므로 내 주변 사람에게는 즐겁고 편한 책 읽기를 권한다. 되도록이면 한 달에 한 권씩 새로 나온 시집을 사서 읽으라고 말하기도 한다. 시집 한 권을 사서 읽어보는 일이라면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큰 부담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작은 시집 한 권이지만 일상에서 만나기 어려운 ‘정채(精彩)의 언어’가 거기에 담겨 있다. 온통 더럽혀진 언어의 흙탕물 속에서 벗어나 정제된 언어 표현의 묘미를 오롯하게 접할 수 있다.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삶은 스스로를 황폐하게 만든다. 책과 점점 멀어지면 결국은 모두가 야만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스마트폰에만 매달린 채 한 달에 커피 한 잔 값도 책에 투자하지 않는다면 그 문화 수준을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권영민 미국 버클리대학 겸임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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