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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점잖은 신도시 주민 1만 명 ‘얼굴 팔면서’ 길거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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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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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시 주민 1만 명이 길거리로 나섰다는 건 그만큼 쌓인 게 많다는 뜻 아닐까요. 참석 못한 나도 생각은 얼추 비슷합니다.”

비가 내리던 19일 오후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주엽동 주엽공원 앞에서 만난 윤경환(가명·62) 씨는 1996년부터 일산신도시에 살고 있다. 그는 “집회장소 바로 옆이 집인데 조금 시끄러워도 괜찮다”며 “일산 주민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8일 ‘3기 신도시 지정 철회’를 요구하는 두 번째 집회가 일산 주엽공원에서 열렸다. 일산신도시, 경기 파주시 운정신도시, 인천 서구 검단신도시 등 서울 기준 서북부 3개 신도시에서 주민 1만 명(경찰 추산 6000여 명)이 집결했다. 12일 열린 1차 집회 참석자(주최 측 추산 1000명, 경찰 추산 800명)의 10배에 이를 정도로 세를 불렸다. 일산 주민들은 “신도시 건설 이후 30년 만에 처음 보는 광경”이라며 놀랐다. 일산, 더 넓게는 서울 서북부 신도시들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 3기 신도시 발표로 촉발된 집회

정부는 7일 3기 신도시의 3차 후보지로 경기 고양 창릉지구, 경기 부천 대장지구 등을 선정했다. 창릉지구는 서울 은평구와 직선거리로 1km 떨어져 있고, 대장지구는 강서구와 맞닿아 있다. 누가 봐도 서울 접근성 측면에서 기존 1, 2기 신도시보다 뛰어나다.

정부 발표 다음 날인 8일, 3기 신도시에 반대하는 ‘일산신도시연합회’(일산연)가 결성됐다. 운영진인 ‘날아라 후곡’(닉네임)은 전화 통화에서 “처음엔 4명이 모여서 집회를 조직했는데 이젠 우리가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일산 지역민의 반발 심리가 커졌다”고 했다.

이들이 3기 신도시를 반대하는 이유는 지구지정 과정의 불법과 미분양 우려 등이다. 지난해 개발도면이 사전 유출된 고양 원흥지구가 이번에 지정된 창릉지구와 3분의 2 이상 개발지역이 겹친다는 것이다. 연합회는 이를 “투기 세력에 로또 번호를 불러 준 격”이라고 비판했다. 탄현, 장항 등 다른 고양 개발지역에다 창릉신도시까지 한꺼번에 개발되면 고양의 미분양이 심화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주민들의 분노는 정치권을 향하고 있다. 18일 집회는 참석자들이 주엽역 인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사무실을 항의 방문하면서 끝났다. 김 장관은 일산서구가 지역구인 재선의원이다. 일산연 측은 “선거, 총선 등의 정치적 관련 발언은 모두 금기로 간주하고 철저히 정치 중립을 지킬 것”이라면서도 “교통개선 등 지역구의 공약을 지키지 않은 김 장관과 이재준 고양시장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장관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23일로 예정된 국토부 기자간담회 때 (일산 집회와 관련해) 몇 가지 말씀을 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한다”고 밝혔다.

이들의 집회가 일산 주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집값 하락’의 영향도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일산서구는 최근 2년 새 아파트 값이 2.89% 떨어졌다. 이는 ‘미친 집값’으로 불리며 10% 안팎이 오른 서울, 경기 성남시 분당신도시 등과 비교하면 격차가 적지 않다.

18일 집회에 참석한 일산 주민 김모 씨(44)는 “집값이 떨어지고 있는 데다 서울에 더 가까운 3기 신도시까지 생기면서 ‘우는데 뺨 맞은 격’이라고 생각하는 주민들이 많다”고 말했다. 3기 신도시 입지가 발표된 이후인 5월 둘째 주(13일 기준)에는 일산서구(―0.19%)와 일산동구(―0.10%) 집값은 하락폭이 더 커졌다. 다만 일산연 측은 “집값 하락은 우리 집회의 목적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 “약속 지켜라” 교통 인프라 강조


운정, 검단 등 2기 신도시들은 “교통 인프라를 예정대로 지어 달라”며 거리에 나선 성격이 짙다. 정부는 고양 창릉지구를 건설하면서 서울 지하철 6호선을 고양시청까지 14.5km 연장하며 7개 역을 새로 짓겠다고 발표했다. 일산 백석동과 서울~문산고속도로를 연결하는 자동차 전용도로도 놓을 예정이다.

모두 국비 투입 없이 입주민이 내는 광역교통부담금 100%로 건설한다. 예비타당성조사를 받지 않아도 돼 주민 입주 시기에 맞춰 지하철과 도로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국토부가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에 대해 서울에서 더 먼 2기 신도시 주민들은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 광역교통분당금은 이미 냈는데, 교통시설은 10년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이라는 것이다. 이승철 운정신도시연합회(운정연) 회장은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건설, 3호선 연장 등 2006년 분양 때 약속했던 교통 대책 가운데 지켜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며 “그런데도 3기 신도시의 교통대책은 서두른다고 하니 주민들 사이에서 ‘사기당했다’는 말이 나오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운정과 검단은 ‘미분양 공포’도 강하다. 2000년대 중반 사업이 시작된 2기 신도시 중에서도 늦게 착공해 아직도 분양하는 곳이 적지 않다. 운정신도시는 3지구 건설사업으로 2020년까지 3만2400채가 추가 공급된다. 검단신도시는 2023년까지 7만4700채가 인천 서구 대곡동 일대에 지어진다.

● 함께 입주했는데 분당 집값의 40%대…30년 쌓인 소외감

서북권 신도시 주민들의 ‘항의’가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보는 시각이 적잖다. 서울 강남권 신도시와 비교할 때 사회 인프라, 교통시설, 거주만족도 등이 떨어지는 상황이 장기간 누적되다가 터진 것이기 때문이다. 주엽역에서 만난 일산 주민 이은희 씨(56·여)는 “집값에 큰 관심은 없지만 같은 1기 신도시인 분당 집값을 들을 때마다 속 터지는 게 사실”이라며 “각종 지역 여건이 집값에 반영되는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일산과 분당의 개발 초기인 1992년 8월 동시 입주한 아파트 두 곳의 가격을 비교해 봤다. 2007년 5억3946만 원, 3억8125만 원이던 분당 ‘이매촌 금강’과 일산 ‘백송마을5차 삼호풍림’ 아파트의 실거래가 평균은 지난해에 각각 8억250만 원과 3억4875만 원으로 격차가 벌어졌다.

같은 1기 신도시에 ‘입주 동기’ 아파트지만, 12년 동안 한쪽이 48.8% 오를 때 다른 쪽은 8.5% 떨어진 것이다. 특히 분당 아파트 대비 일산 아파트 가격은 지난 10년 동안 60% 선을 오르내리다 지난해 43.5%까지 하락했다. 그만큼 지난해 일산의 주택가치가 저평가되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일산의 한 아파트 입주자대표는 “집값이 안 오르는 동네라는 소문이 도니 살고 있는 사람들도 팔 시점을 고민한다”며 “집을 급매로 내놓고 그게 거래되면 집값이 더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1990년대 초반에 일산으로 이사 온 직장인 강모 씨(35)는 “출퇴근에 편도 1시간이 걸려도 일산이 내 고향이라는 생각에 지금껏 살아 왔지만 3기 신도시 발표 이후 주변 친구들조차 ‘이제는 서울로 가자’고 이야기할 정도”라고 현재 일산의 분위기를 전했다.

● 새로운 교통대책, 신도시대책 재검토 필요


3개 신도시 주민들은 25일에도 검단, 일산 등지에서 3차 집회를 열 예정이다. 이들의 움직임을 ‘지역 이기주의’로 보는 시각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1기 신도시는 계속 노후화되고 있고, 2기 신도시는 10년 넘게 제대로 된 도시 기능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만큼 집회 장기화 여부와 관계없이 1, 2기 신도시를 향한 추가 대책은 필요해 보인다.

일단 국토부는 내년 상반기(1~6월) 중에 2기 신도시 교통 대책을 내놓을 예정이다. 만약 확실한 문제가 드러난다면 기간을 최대한 당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운정연 이승철 회장은 “정부가 기획 부동산도 아니고 ‘여기 좋습니다’하면서 분양 홍보한 뒤 내팽개친 것이 2기 신도시의 실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집값 침체가 장기화되는 신도시라면 수도권 내에 있더라도 요건을 살펴 규제지역에서 해제해 주는 것도 검토할 만한 방안으로 꼽힌다.

그동안 ‘서울 집값 잡기’ 수단으로만 접근해 온 정부의 신도시 정책 자체를 재검토해 봐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번 사태 역시 그동안 보안만 강조하다가 의견 수렴을 하지 않은 채 신도시를 결정한 부작용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란 지적이다.

박재명기자 jm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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