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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오늘의 경제소사]맨체스터 선박 운하의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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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개통, 리버풀과 희비 갈려

축구 도시의 증오와 내륙 항구 도시, 최초이자 최대의 공업단지. 난집합 같지만 셋은 ‘맨체스터’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산업혁명의 발원지 맨체스터는 아직도 유럽 최대의 산업단지다. 최초의 철도노선인 리버풀-맨체스터 철도(45㎞)가 깔린 1830년 이래 두 도시는 공동 번영의 길을 달렸다. 하지만 19세기 말 이후 리버풀FC의 팬들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원수로 여긴다. 맨체스터 선박 운하(Manchester Ship Canal)가 운명을 갈랐다.

서울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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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최초의 상업용 운하가 탄생한 시기는 1761년. 맨체스터 인근의 석탄운반용 브리지워터 운하(16㎞)가 시초다. 싼 운임 덕에 석탄 가격이 절반으로 떨어지자 이 운하는 46㎞로 연장되고 영국 전역에 20년 동안 1,500㎞가 넘는 운하가 뚫렸다. 19세기 들어 투기 과열의 후유증을 겪기 시작한 운하는 철도의 등장과 함께 경쟁력을 잃었다. 영국 자본은 왜 운하의 전성시대가 한참 지난 19세기 말에 맨체스터 선박 운하를 팠을까. 세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 1660년부터 건설 계획이 나왔을 정도로 수요가 있었다. 둘째, 대서양과 오대호의 산업도시를 연결한 미국 이리 운하의 개통과 꾸준한 확장에 자극받았다. 셋째, 1873년 시작된 장기공황 속에 화주들이 리버풀의 하역노조와 맨체스터 철도노조의 임금 인상 압력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결국 영국 민간자본은 당시 1,500만파운드(현재 약 65억7,700만파운드·10조원)를 들여 4년간 운하를 뚫었다.

빅토리아 여왕이 참석한 공식적 준공일인 1894년 5월21일(실제 개통일은 1월1일) 이후 운하는 흑자 가도를 달렸다. 해안에서 40㎞ 떨어진 내륙도시 맨체스터는 영국 3위의 항구로 떠올랐다. 대신 리버풀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희망을 잃은 노동자들은 1892년 발족한 축구팀 리버풀FC가 맨체스터 연고지 팀들을 상대할 때면 목이 터져라 응원을 보냈다. 리버풀과 맨체스터의 앙숙 관계는 여전하지만 운하는 지난 1958년 정점을 찍은 이래 생명이 꺼져가고 있다. 북극항로 본격화를 대비해 550억파운드에 이르는 초대형 투자가 거론되고 있으나 가시적 성과는 없다.

한창때 6,400㎞에 이르던 영국 내륙 운하의 총연장은 4,000㎞ 이하로 줄어 물류의 0.1%만 맡을 뿐이다. 다른 국가의 사정도 비슷하건만 10여년 전 이 땅은 거꾸로 갔다. 길이 550㎞ 안짝의 운하로 경부 운송물량의 80%, 전체 물류의 14%를 담당하겠다며 삽질해댔으니.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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