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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군인의 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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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편집장의 편지

한겨레21

2018년 9월27일 소인이 찍힌 노란 봉투가 아직도 사무실 책상 서류 뭉치에 끼여 있다. 전북 전주시에 사는 ㄱ씨가 보낸 우편물이다. 봉투 안에는 24쪽짜리 내용증명이 들어 있다. ㄱ씨의 요구 사항은 20년 전 기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ㄱ씨의 기억은 이보다 조금 구체적이었다… 제가 베트콩 당한 줄 알고 후퇴했던 아군 병력이 다시 돌아와 할머니와 아가씨를 죽였습니다… 한 30여 명 됐던가? 애들부터 어른까지 막 좋아하면서 웃고… 우리가 남겨놓은 씨레이션(미군 전투식량)을 먹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공격 명령이 떨어지니 총들이 불을 뿜고…도망가고…쓰러지고….”

ㄱ씨는 자신에 관한, 애초 자신이 말한 모든 기사 내용의 누리집 게시를 중단하고 영구 폐쇄를 요청했다. 기사를 삭제하지 않을까봐 그랬는지 동시에 더 낮은 수준의 정정 요청도 했다. ‘죽였다’를 ‘도망갔다’로 고쳐달라고 했다.

1999년 12월 발행된 <한겨레21> 제289호 기사(‘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죽였다’)를 삭제해달라는 ㄱ씨의 내용증명이 다시 떠오른 건 한국방송(KBS)의 5월15일치 뉴스를 보면서다. “‘광주 투입 헬기, 탄약 5백발 사용’… 5·18 군인의 증언”이란 제목의 기사는 5·18 당시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경기도 하남시 소재 31 항공단 탄약 관리사 최종호씨의 짧은 인터뷰를 담았다. 광주로 출동했다가 돌아온 코브라 헬기에 실린 20㎜(벌컨포) 보통탄과 7.62㎜ 기관총 탄약이 각각 약 200발, 300발씩 줄었다고 증언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민들을 향해 대검과 곤봉, 소총, 기관총뿐 아니라 심지어 전쟁터에서 볼 수 있는 헬기 사격까지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간접 목격담이었다. 헬기 사격의 탄흔과 사격 목격자에 이어 탄약 관리사의 공개 증언까지 보태진 셈이다.

사실 기사를 보면서 진짜 궁금한 건 헬기 조종사들이었다. 그들은 왜 입을 열지 않았을까. 그 단서는 ㄱ씨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내용증명에서 불순 단체들이 악용할 우려와 함께 “본인은 물론 32만 월남전 참전자들의 명예가 훼손될 우려”를 내세우며 기사 삭제를 요청했다.

군인의 명예 앞에 진실은 얼마든지 유보될 수 있다. 20년 전 ㄱ씨를 처음 만난 고경태 기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온전히 그대로 얘기하는 개인은 없다. 다들 전우회의 일원이다. 지금도 촘촘한 옛 관계와 조직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명예 때문이기도 하다. (진실을 말하면) 가족이 자신들을 어떻게 보겠는가. 그래서 자꾸 상황논리로 합리화하려 한다.”

군인의 명예는 진실을 축소하고 부정한다. ‘내가 어린아이와 여성, 노인들을 쐈다’고 고백한 참전자를 고 기자는 20년 동안 거의 만나지 못했다.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희생자가 최소 9천 명이 넘는데도 그렇다.

광주에서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내야 하는 군인에 의해 수백 명의 시민이 죽었다. 그 광란의 학살 현장에서 총을 쏘고, 대검으로 찌르고, 곤봉을 휘두르고, 주검을 암매장한 군인들은 다 어디로 숨었는가. 헬기 조종사의 명예, 공수부대원들의 명예, 신군부의 명예는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광주의 진실을 가리고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추적 보도해온 정대하 기자의 말도 고경태 기자와 비슷하다. “조종사나 특전사 동기들끼리 견고하다. 그 무리 안에서 나와 증언하기 쉽지 않다.”

명예를 방패 삼은 비겁한 군인들에게는 베트남에서 저지른 학살도, 광주에서 저지른 학살도 없다. 용기 있는 군인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진실은 온전히 드러날 수 없다. 더 늦기 전에 양심 있는 군인들을 보고 싶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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